11월이다. 겨울을 문턱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공기가 집을 에워싼다.
나는 겨울이 싫다.
엄동설한의 추운 날씨가 멀쩡한 사람을 괜히 옥죄고 웅크리게 만드는 것 같아서 싫고, 겨울 특유의 우중충한 분위기도 싫다.
일조량이 줄어듦에 따라 우울 증상이 발생할 수 있으니 햇볕을 쫴야 한다는데, 날이 추우니 어디 나갈 수가 있나. '날씨가 춥다>나가기 싫다>집에 있고 싶다>우울하다>나가야 한다>날씨가 춥다'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아가는 꼴이다.
무엇보다 선택의 기로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입, 대입, 수능, 임용 등 크고 작은 시험들은 죄다 겨울에 몰려있는 탓에 연말만 되면 선택한 답지들이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되물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반성과 성찰은 셀프요, 책망과 자학은 원쁠원이다.
나이가 들면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학교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내가 아닌 아이들이 그 선택을 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에 괴로워하고 회피도 해보다가 결국은 선택을 한다.
아직은 어린 나이라 어른의 입김이나 시간의 압박으로 선택을 종용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대개 본인의 주관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선택에 따른 결과와 책임도 본인의 몫. 선택이 성공으로 간다면 참 다행이지만 실패할 경우, 아이는 세상의 쓴맛을 처음으로 경험해야 한다.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니라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별일이라는 것이 살다 보니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을 정도로 크게 다가오는 때도 있어 괜스레 서글퍼진다.
하지만 올해 겨울은 시작이 좋다.
작년에 가르쳤던 제자가 예고에 합격을 했다며 연락을 준 것이다.
또래 여학생들보다 키가 작고 왜소했지만 몸이 유연해 춤을 잘 추고 끼도 다분한 친구였다.
재작년 가르쳤던 제자가 들어간 예고에 자기도 꼭 가고 싶다며 공부를 잘해야 합격할 수 있는지 하루종일 쫓아다니며 합격 비법을 묻곤 했는데 기어코 합격한 모습이 못내 자랑스럽다.
작년 한 해 나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내 시간표를 나보다도 더 잘 꿰고 있던 아이, 쉬는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면 달려와서 지금은 몇 반에 가야 된다고 손을 잡아끌던 아이였다.
교과서 앞면에 학기 시간표를 붙여놓기도 했고, 컴시간 알리미도 있어서 클릭질 몇 번이면 다음반 수업 확인이 가능했다. 그러나 매니저 노릇을 톡톡히 해내던 녀석의 모습을 눈에 자주 담고 싶어 일부러 지금은 몇 반을 가야 되냐고 묻곤 했었다.
우호적이었던 우리의 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삐그덕거리는 것이 있었다면 그건 아마도 '급식 문제'가 아니었을까. 일주일에 두세 번은 급식을 먹네마네로 나와 티키타카를 했는데,
- 싸랑하~~~는 선생님~~~ 제가 춤 동아리잖아요~? 점심시간에 춤 연습이 있어서 가봐야 될 것 같은데요~ 노래 틀어놓고 춤 연습을 해야 돼서 핸드폰을 잠깐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 싸랑하~~~는 정민아, 급식은 어떡할 거니~~?
- 오늘은 춤 연습이라 급식은 먹지 못하고~~~~
- 응, 안돼. 돌아가.
- 아 선생님!! 내일부터는 밥 잘 먹을게요ㅠㅠㅠ 오늘 핸드폰 안 가져가면 선배들한테 혼나요ㅠㅠ!
- 누가 혼내? 데리고 와. 누굴 혼내, 우리 집 귀한 새끼를!
- 그리고 오늘 급식 맛없단 말이에요!
- 오늘? 와 오늘 겁나 맛있어서 나 두 그릇 먹고 옴. 먹고 오면 핸드폰 줄 테니까 빨리 갔다 와~~
이런 류의 대화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밥 먹기 싫으면 같이 나오는 과일이라도 먹고 와라, 주스 나오니까 그거라도 마시고 오던지. 춤 연습하려면 배고프잖냐 아침도 안 먹고 오면서. 하나라도 먹고 오면 바로 춤 연습 보내줄게.]
라는 잔소리를 1교시부터 점심시간 전까지 하다 보니 내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아이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안 먹겠다는 것을 억지로 앉혀다가 먹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스트레스라 오늘만 봐주자, 흐린 눈 하고 넘어가자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성장호르몬 주사를 직접 배에다가 꽂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강 건너 불 보듯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급식을 안 먹겠다며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아이를 붙잡아 회유책도 써보고 부모님께 전화드린다고 협박도 해보다가 결국에는 각서까지 받아내고 말았다.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 너머로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핸드폰 가방을 꺼내며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녀석, 춤추는 게 그리 좋을까.
교사가 된 뒤로 내리 사용하고 있는 급훈 [삶에 정성을 다하자]의 행위주체성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교탁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나 또한 포함이었다.
삶에 정성을 다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성실하게 행동해야 한다.
자유의지를 가져라. 내가 직접 선택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삶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니 충분히 생각해 보고 답을 내릴 것. 시간이 걸리는 문제일지라도. 어떤 선택이든 나는 너희들의 선택을 존중할 테니까.
조종례 시간이나 개인 상담을 하면서 늘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들이다.
그러나 아이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서도 내 귀가 빨개지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이미 세상의 단맛, 쓴맛을 알아버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하는 나를 발견할 때이다. 사방에서 걱정과 경우의 수들이 튀어나와 선택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릴 적부터 미용사가 꿈이라 고등학교도 뷰티과로 가고 싶다, 요리사가 꿈이라 조리고를 가려고 한다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길은 많이 힘들 텐데.. 잘할 수 있으려나'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라 내 발목을 잡는다.
형형색색 풍선껌보다도 더 부푼 아이들의 꿈을 보고 있자니 당장 닥칠 현실이 눈에 그려져 행여나 상처를 받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 어화둥둥 1년 동안 사랑으로 키운 내 새끼들이 가시밭길로 가는 것을 차마 보기 힘든 탓이 컸음이라.
하지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저 없이 선택하여 밀고 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면 가슴이 요동을 친다. 나아가 이것을 이루기 위해 그간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용기에 존경심마저 들 때가 있다.
나는 엄두도 못 낼 일들을 이네들은 해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삶에 정성을 다하다 못해 '쏟아붓고' 있는 중인 아이들.
선택과 결단 사이에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길에 이제 막 문을 두드리고 한 발을 내디딘 모습들이 새벽녘 이슬을 한 움큼 먹고 반짝이는 잎사귀 같이 파릇파릇하다.
제자의 사랑스러운 메시지를 남편에게 읽어주며 오늘 메뉴는 '소불고기를 넣은 김밥'이라고 일러주었다.
얄궂은 인생에 수많은 선택지가 놓일 것이고 그때마다 이리 재고 저리 재며 발을 동동 굴릴 텐데, 아침 메뉴 하나 정도는 내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고 결단을 내려도 되지 않을까.
메마르고 건조한 겨울인데 인생까지 시험받는 느낌으로 살 수는 없다. 김밥에 미어터지게 들어간 소불고기가 헛헛한 빈속을 채워줄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 만든 김밥은 신기하게도 4줄이든 5줄이든 끝도 없이 들어간다.
이보다 기똥찬 선택지가 또 있을까.
오늘따라 제자의 춤사위가 그립다.
급식 때문에 춤 연습에 늦거나 못 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해 열이 받을 만도 한데 언제나 그다음 시간에 깔깔거리며 교무실을 찾아와(놀러와) 내 옆자리에서 다음 스케줄을 체크해 주던 아이가 어찌나 고맙던지.
부디 녀석의 선택이 틀리지 않기를.
속을 꽉꽉 채운 소불고기 김밥처럼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는 더 멋지게 성장해 있는 녀석이기를 기대해 본다.
*글 속에 등장하는 학생의 이름은 가명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