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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식탁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

by 채움



#1.

10개월이 된 아이에게 최근 이벤트가 유독 많았다.


첫 번째는 아이의 방.

신생아 침대를 졸업할 시기가 다가오자, 차일피일 미루던 아이 방을 드디어 꾸미기 시작했다.

에어컨 문제, 곰팡이 걱정, 도배 고민까지 겹쳐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가구도 없이 휑한 방에서 러그 위를 기어 다니며 놀던 아이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아이의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연한 레몬색과 베이지색 벽지를 고르고, 어울리는 소품들을 하나씩 찾아 나섰다.


두 번째로 이유식.

이유식을 시작한 지 벌써 네 달째에 접어들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와 함께 보내는 아침이 어렵다.


그래도 분유만 먹던 8개월까지의 아침은 단순했다.

따뜻한 물, 분유 통, 젖병만 꺼내면 끝이었으니까.

아침마다 배고프다고 소리를 지르던 아이도 개월 수가 차면서 제법 의젓해졌는지, 30분은 거뜬히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9개월이 되며 아이에게도 아침 식사라는 이름이 생겼다. 조금 번거롭고, 아주 고된 이름으로.

'아침 is 이유식'.




#2.

아침 이유식이 쉽지 않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도 하고, 이유식을 위한 레시피도 찾아봤다. 후기 이유식 진입에 맞춰 진밥도 시도했고, 형형색색의 큐브와 더불어 정성껏 육수도 우려 놨다.

말하자면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 상태였다.

그런데 막상 아침마다 이유식을 데우고, 식히고, 먹이려다 보니 이건 전쟁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아이가 잘 먹지 않았다.

시간을 30분씩 늦춰봐도, 메뉴를 오트밀 포리지로 바꿔도, 시판 이유식을 사서 먹여도 결과는 똑같았다.

아이는 입을 꾹 닫거나 짜증을 냈고, 하이체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도 아니면 밥을 얼굴에 묻히며 촉감 놀이를 시작했다.


나는 정신이 없었고,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숟가락은 수시로 바닥에 떨어졌고, 나도 모르게 아이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 왜 안 먹냐, 한 숟갈만 먹어봐 응?"

물론 아침에 입맛이 없는 건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한동안 아침 식탁은 아이의 짜증과 내 마음속 반야심경으로 뒤범벅이 된 채 끝나곤 했다.


10개월부터 곧잘 먹태기가 온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 아쉬움과 서운함, 짜증과 현타가 물밀듯 밀려왔다.

나를 더 속상하게 만든 것은, 이 아침식사가 내게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면서 우리 부부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건강하고 따뜻한 식탁을 차리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런데 정작 그 식탁에는 먹지 않겠다는 눈빛을 내뿜고 고개를 돌리는 한 어린 짐승만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즈음부터, 스스로에게 끝없는 질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내가 뭘 위해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거지?'를 시작으로,

-아침 식사는 왜 해야 하지?

-아침 식사, 우리에게 좋은 게 맞나?

-아니, 이렇게까지 안 먹는데 아침 식사가 의미가 없지 않나?

-이 프로젝트 접어야 하는 거 아닐까?

몇 날 며칠 물음표로 가득한 날들이 이어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이와의 아침밥 사투는 계속되었다.

주 7일을 매일 이유식으로 먹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이유식과 오트밀 포리지, 분유를 섞어가며 주기 시작했고, 다행히 아이는 서서히 적응해 갔다.




#3.

이 평화를 무너뜨린 건, 바로 '이'.

10개월에 접어들며 드디어 쌀알 같은 작은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 안이 불편해진 아이는 손가락을 입에 욱여넣으며 또다시 먹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하늘이 고사를 지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영화 인터스텔라 대사를 떠올리며, 이유식 책, 육아 카페, 블로그 등을 닥치는 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손으로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분유크림으로 리조또를 만들고, 토마토와 고기, 채소를 다져 라구 소스를 끓였다. 닭가슴살과 애호박, 버섯을 갈아 전을 부치고, 다진 생선에 애호박을 섞어 생선전도 만들었다. 아이의 최애 식재료인 치즈를 넣어 떡갈비도 만들어 보았다.



'그래, 안 먹어도 괜찮아. 적어도 나는 해봤다'는 마음으로 계속 만들기를 2~3일.

마치 무기라도 마련하듯, 냉장고와 냄비를 오가며 나는 또 한 번 전쟁을 준비했다.

체념과 오기의 중간 어딘가. 나아가 ‘너에게 맞는 음식을 꼭 찾아낼게’라는 마음 하나로 매일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것도 허탕이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한 숟갈 떠봤는데, 놀랍게도 아이는 고개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자기 손으로 먹으려는 날도 있었고, 더 달라고 책상을 탕탕 두드리는 날도 제법 많아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밥을 먹는 건 아이지만, 밥을 지으며 버텨낸 건 나라는 것을.


아침식사의 의미는 매일 달라졌다.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

그다음에는 하루의 리듬을 위해,

어떤 날은 '그냥 살아내기 위해' 식탁에 앉았고,

지금은 '기다림과 인내를 배우기 위해' 이 자리에 앉는다.


우리의 식탁에는 매일의 감정이 녹아있다.

허탈함, 실망, 기대, 안도, 그리고 아주 작고 조용한 기쁨까지.

'아침식사 프로젝트'의 첫출발은 건강과 삶의 리듬이었지만, 아이와 함께 밥을 만들고 먹으며 나는 기다림과 꾸준함, 사랑을 배우는 중이다.


물론 지금도 매일 잘 먹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밥이 입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짜증을 내서 중단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옷과 얼굴에 밥풀만 잔뜩 묻은 채로 끝나기도 한다.

그래도,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아이가 먹을 아침밥을 만든다.


먹여야 하는 아침이 아닌, 함께 나누는 아침으로 가기까지는 아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기꺼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내일도 다시 식탁 앞에 앉아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아침을 꿈꾸며, 나는 또 아침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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