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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양 Mar 20. 2024

봄꽃이 좋다

“왠지 모를 기쁨과 슬픔의 공존”



태양은 더러운 곳을 뚫고 지나가도,
그 자신은 이전처럼 순수한 채로 남는다.

학문의 진보 <F. 베이컨>






  그 맘 때면 꼭 비가 내렸다. 얼어붙었던 땅 위로 잔잔하리만치 고요하고도 사뿐하게 비가 내리면, 나는 내가 딛는 이 땅에 봄이 왔음을 알았다. 비를 맞은 땅은 부드럽게 질척였고 그 사이로 순결하고도 여린 애기풀들이 조금씩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봄비는 내내 햇볕 하나 들지 않았던 구석진 또랑 사이에도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 신호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그 맘 때의 길을 걸으며 왠지 모르게 말랑해지는 기분에 슬프고도 기쁜, 기묘한 감상에 젖고는 했다. 봄비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얼마 안 가 다양한 색의 꽃들이 피어났는데, 그건 고고하기도 했고, 앙증맞게 귀엽기도 했으며 신비롭기도 했다.



  머리칼을 상냥하게 어지럽히는 바람에는 고혹하고도 우아한 향이 실려있었다. 그 향을 눈으로 좇아 마주한 곳에는 꼭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시리지만 섬세하게 강인한 자태, 그것이 내가 본 매화나무에 대한 감상이었다. 파리한 흰 눈을 얹어 놓은 듯한 매화꽃은 겨울을 닮은 듯 보였지만 노란 꽃술은 영락없이 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추위가 가실 즈음, 아니 추위 속에서도 가장 먼저 피어나는 꽃, 그것이 매화꽃이었다.


  볕이 잘 드는 길가 곳곳에는 다양한 꽃들이 있었다. 신비로운 제비꽃이, 앙증맞은 봄까치꽃과 수수한 냉이꽃이, 또 독특한 할미꽃이 곳곳에 피어 꽃들을 보는 즐거움을 줬다. 학창 시절 매일 등하교를 위하여 왕복 8km 정도의 길을 걸어 다니는 일은 어린 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난 그 점을 축복이라고 여겼다. 매년마다 한 시절의 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건 다양한 이유 중 하나의 주된 이유로 꼽을 만했다.


  물론 도시 문화가 와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시골에서의 사시사철은 제 나름의 특색으로 사실 전부 아름다웠지만, 나는 특히 봄꽃이 참 좋았다. 오종종 모인 봄꽃들은 그야말로 친근했다. 그리고 춥고 삭막한 겨울을 지나 오랜만에 맞이한 다양한 색상의 생명은 그 색을 더 아름답게 보이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어 주었다. 또 봄바람에 실린 꽃내음은 매우 은은하면서도 강렬했는데, 그 향을 맡고 있으면 왠지 모를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와 마음이 이상해지곤 했다.



  그즈음이면 할머니댁 앞마당에도 봄이 찾아왔다. 할머니댁 앞마당에는 된장이며 고추장, 그리고 간장 등 직접 담근 장을 담아둔 장독들을 올려놓는 야트막한 시멘트단이 작게 있었는데, 그 살짝 벌어진 돌틈 사이로도 봄꽃이 폈다. 때로는 개불알풀이, 때로는 제비꽃이, 그리고 매년 냉이꽃과 유채꽃이. 봄꽃은 어떻게 딱딱한 그 돌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걸까. 끈질긴 생명력에 다시 한번 감탄을 내놓기도 전에 나는 그저 그 자태에 반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도 봄꽃은 어여쁜 찰색으로 빛을 발할 뿐이었다.






행복해야 돼.
행복해야 돼.



  그간 묵어있던 할머니 인생의 설움을 토해내 듯, 그리고 애처로운 주문을 외듯 할머니는 손주 녀석들만 보면 이 말을 외쳐대셨다.


  가족들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생전 할아버지는 엄청나게 지독한 분이셨다 했다. 할아버지는 가족의 안위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본인의 자존심만을 챙기며 사셨다 했다. 집으로 돈 한 푼 제대로 가져다주지 않는 할아버지 덕에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을 어찌 키워야 할지 몰라 할머니는 언제나 애가 타셨다고. 그래놓고 성격은 어찌나 깐깐한지 틈만 나면 가족들에게 성질을 부리고, 저녁이면 술에 취해 가족들을 괴롭히셨다고.


  그런 세월을 전부 겪어낸 할머니의 마음은 오죽이나 서러울까. 깊게 파인 주름과 끝마디가 휜 할머니의 손가락이 할머니가 살아온 그간의 세월을 대변한 것 같았다. 옛일을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눈가로 조용하고도 깊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언제나 인자했던 나의 할머니, 자식들 앞에서는 언제나 품을 내어주셨던 나의 할머니.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가, 할머니라서 나는 마냥 좋았는데, 할머니는 할머니의 인생을 누구보다 강인하게 살아낸 여성이었구나. 문득 생각 하나가 나를 스쳤다.


아, 마치 봄꽃 같은 나의 할머니





  봄에는 애처로운 냄새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길가에 피어난 어여쁜 봄꽃들에서도 그런 냄새가 났다. 양지바른 곳에 자라난 꽃들은 지난겨울의 찬 기운을 단번에 잊게 할 만큼 눈이 부셨다. 나는 가장 먼저 봄을 찾아낸 그 꽃들이 유독 좋았다. 추위를 견뎌 제일 먼저 온기를 찾아냈을 그 꽃들이 좋았다.


  어쩌면, 어쩌면, 내가 봄꽃이 좋았던 건 봄꽃이 할머니를 닮아 있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도 누구보다 가장 자식들의 행복을 바라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롭고 너무도 감사하게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나는 유독 더 봄꽃이 좋았던 건지도 몰랐다.


봄꽃같은 할머니와 그녀를 마주한 증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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