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변함없이 아이들이 오전부터 도서관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대출한다. 책상 앞에 몰려와 수다를 떠는 친구들도 있다. 가방을 내려놓기 전부터 북적거리는 틈으로 2학년 정호가 슬며시 들어온다. 뭔가 비밀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 아이들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조용히 내 곁에 다가온다. 그리고 살그머니 내미는 종이 한 장.
그건 어젯밤에 한 시간은 걸려 썼음직한 편지 한 장이었다. 흰 종이에 색색깔로 곱게 그림을 그려 색칠한 데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써 내려간 것이 보통 정성이 아닌 듯보였다.
"선생님, 저 때문에 너무 고생이 많으십니다."로 시작하는 편지는 경어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이다운 글이었는데 중간에 "이건 선생님과 저만의 비밀인데요, 저 선생님 좋아해요."란 문장을 접할 땐 나도 모르게 푸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엊그제 독서 행사에서 상을 받은 것이 무척이나 기뻤던 모양이다. 그 덕이 나 때문이고, 게다가 그 이유로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하다니....
난 아이들의 이런 가벼움이 정말 좋다.
진우가 와서 말한다.
"선생님, 저희 밭에 수박이 열렸는데요, 지금 요만한 게 세 개 열렸거든요."
"어, 수박?"
"근데 수박이 잘 익으려면 자꾸 만지면 안 되잖아요. 스트레스받잖아요."
"어, 그렇지."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만지는 거예요."
"아니 누가? 왜?"
"저희 집이 꽃 축제했던 동네거든요."
"아, 꽃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신기하니까 들여다보고 가는구나."
"네."
"그래서?"
"그래서 아빠한테 푯말을 만들어달라고 했는데요, 아빠가 아직 안 만들어주셨어요."
띵...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아이도 수박이 스트레스받을까 봐 걱정하는데 아빠가 안 해주신다? 지금 진우는 내게 아빠에 대한 섭섭함을 이야기한 것인가? 그럼 뭐라고 해줘야 하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리다 말한다.
"그럼 진우가 하면 어떨까? 형이랑 같이 해봐."
"히히. 전 못해요."
나는 별수 없이 "사람들이 그런 거 안 만지면 좋을 텐데... 그렇지?" 같이 공감하는 수준에서 대화를 마쳤다.
"그리고 참외는 지금 15개 정도 열렸는데요, 아직 파래요."
"와, 정말 신기하다. 잘 익어야 할 텐데..."
진우와 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우는 미소를 띠며 집으로 돌아갔다. 진우는 5학년인데, 조용하고 섬세한 편이며 말보다 행동으로 따뜻함을 보여주는 아이다. 아쉽게도 책읽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 도서관에 자주 오지는 않는다. 어제는 열심히 캐고 받은 감자 10개 중 3개를 나에게 덥석 건네주고 갔다. 자기는 집에서 감자를 캐면 된다면서.
무엇보다 아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즐겁다. 학원 과외를 몇 개 하고, 누가 잘났고 못났고를 이야기하기보다 수박이, 참외가, 감자가, 버찌가, 산딸기가 언제 열리는지 어떤 맛인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그것 때문에 고민도 해볼 수 있다는 게 나로서는 감격할 만큼 감사하다. 아이들의 순수함을 만나는 날엔 그날의 날씨마저도 모든 게 축복으로 느껴진다. 물기가 산을 한가득 적셨다. 습기는 차지만 은은하며 묘한 회색빛 기운과 하늘이, 물기 묻은 바람이 스쳐가는 것도 좋다. 감사하다...
한 번은 게시판에 <행복한 읽기>란 제목으로 신문기사나 활동들을 격주로 올려놓았을 때다. 이번에는 나뭇잎 책 만들어오기와 낱말퍼즐이 활동과제였는데, 지난번에 비해 아이들이 흥미 있어한다. 5학년 민지와 운식이가 와서 나뭇잎 책을 만들어오겠다고 난리다. 난, 그래, 하고 말했을 뿐인데, 정말 밖으로 나가더니 10분도 안돼서 나뭇잎 8장을 모아 왔다.
둘은 정말 웃기는 친구들이다. 민지는 키도 크고 성숙한 편이다. 하지만 하는 행동은 선머슴처럼 덜렁대고 남자애들과 잘 어울린다. 반면에 운식이는 남자아이지만 말도 많고 조금 여성적이다. 자신감도 부족하고 끈기가 없다. 조금 하다가 안 되면 쉽게 포기해버리곤 한다.
이 둘이 낱말 퍼즐을 하겠다고 하는데 무척 어려운가 보다. 둘 다 책도 잘 안 읽고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는데 어쩐 일인지 나뭇잎 책 만들기랑 낱말퍼즐을 풀겠다고 끙끙대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했는데, 둘이 오가는 대화가 더 웃겼다. 운식이가 자꾸 민지가 한 걸 힐끔힐끔 쳐다보고 따라 하니, 민지는 귀찮은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4학년 정규가 와서 자신도 참여하겠다며 어디선가 나뭇잎을 잔뜩 따갖고 왔는데 그걸 보더니 운식이 하는 말.
"야, 너는 이게 나뭇잎이냐? 이건 나뭇잎이 아니야. 너 저기 신문에 나무와 풀의 차이 안 읽어봤어?"
"에이, 그냥 해."
"안돼. 이건 나뭇잎이 아니야. 선생님, 이건 나뭇잎 아니죠?"
"에이, 그냥 하는 거야."
난 둘이 옥신각신하는 걸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그때 운식이가 다시 물었다.
"근데 정규야, 넌 밭에 갔다 왔니?"
"푸하하하."
내가 보기에도 나뭇잎이 아니라 채소 잎을 따온 것 같았다.
"에이, 선생님 그냥 해요. 떨어진 거 주워온 거예요." 정규가 이렇게 사정했지만 운식이는 단호했다.
"안돼. 이건 나뭇잎이 아니잖아."
운식이 말에 정규가 이번에는 낱말퍼즐에 도전했다. 운식이가 한 걸 힐끗힐끗 쳐다보니, 운식이 하는 말,
"선생님, 정규 좀 보세요. 자꾸 제 걸 봐요. 아주 귀찮아 죽겠어요."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퍼즐을 풀던 민지가 한 마디 한다.
"야, 나는 네가 더 귀찮아 죽겠거든. 내가 한 거 거저 먹으려고 하면서어?"
밉지 않은 표정으로 반격을 날리는 민지의 말 한마디. 운식이는 그 뒤로 아무 말도 안 했다.
* 이미지는 <리디아의 정원>(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그림/시공주니어)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