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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Jul 11. 2021

연체된 아이의 수줍은 편지

날이 더운 날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찾습니다. 에어컨 덕분(?)에 더위를 피해 온 어른들이 어린이만큼이나 많기 마련이지요. 책 읽기 딱 좋은 그런 공간입니다. 에어컨을 껐다 켰다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대출반납을 하다 보니 어느새 문 닫을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참 빨리 갔다는 생각과 함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빈 도서관에 있으니 갑자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피곤이 몰려왔습니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에, 여느 때처럼 가끔씩 늦게 도서관에 들르는 사람들 중의 하나일 거라 생각하며 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들어온 아이는 평소 도서관을 잘 이용하는 남자아이였는데,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고는 "저희 누나 안 왔어요?" 합니다.

"음, 누나가 누군데?"

"김지현이요."

"아, 아까 왔다 간 거 같긴 한데... 지금은 없는데.."

"여기 있었다고 해서요. 찾고 있는 중이에요."

"아, 그렇구나."

아이는 "안녕히 계세요." 하곤 싱겁게 가버렸습니다.

잠시 후, 또다시 바깥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번엔 또 누굴까 생각하고 있는데 또다시 아까 온 그 아이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거요, 누나가 반납하는 책인데요, 늦게 갖고 와서 저보고 갖다 주래요."

"아, 그래."

아이가 주는 두꺼운 책 <끝없는 이야기>를 받아 드는데, 책 위에 꽃잎 두 장과 나뭇잎 한 장이 얹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거는요, 누나가 죄송하다고요 선생님 드리는 거래요."

"하하.. 정말?"

누군지 얼굴은 모르겠지만 귀엽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내 웃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책과 꽃잎과 함께 온 낡은 종이-이면지를 두 번 접은 A4용지-를 버리려다 혹시 하는 마음에 펼쳐보니, 그건 연체한 아이가 내게 쓴 편지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책을 빌렸던 학생입니다.

책이 연체돼서 죄송하고요, 

시험기간이라서 책 읽는 게 지체되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네요. - -;;

그럼 안녕히 계세요. 


P.S. 요즘 더우니까 몸 관리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To. 도서관 선생님께 

                                      -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리곤 아래에 귀엽게 웃는 자신의 캐릭터와 이니셜을 써 놓았습니다. 연체를 하고도 미안한 줄 모르고

연체 날짜 줄여서 책 빌려가면 안 되냐고 가끔 조르는 사람들과 책을 갖고 아무 말 없이 이사가 버려

분실신고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사람들과, 몇 달 동안 아직 책을 반납하지 않은 채 연락조차 두절된 사람들 때문에 가끔 심신이 지치곤 했는데, 며칠 연체했다는 이유로, 선생님 얼굴조차 볼 자신이 없는 이 수줍은 어린이의 고백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책을 사랑하고 약속을 못 지킨 것에 미안해할 줄 알고, 고마움과 미안함을 작은 편지와 작은 꽃잎으로 표현할 줄 아는 그 어린이야말로 이 각박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이가 보내온 꽃잎을 티슈에 넣어 책 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곱게 말려서 책갈피를 만들 생각인데, 그중 하나는 그 아이에게 줄 참입니다.    


* 이미지는 <부르노를 위한 책>(니콜라우스 하우데바흐 지음, 김경연 옮김/풀빛)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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