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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Jul 11. 2021

아름다운 아이

성실함을 이겨내는 건 없다


내가 진아를 만난 건, 진아가 중2 되던 때였다. 봉사점수를 받기 위해 도서관 봉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70년대 중고생들이 입었던 흰 카라의 까만 교복을 입으면 딱 어울릴법한 차분한 얼굴과 단발머리를 한 소녀였다.


어느 날 책 정리를 하다가 "선생님, 이거 제가 가져도 되나요?"라고 물었다.

진아 손에 들린 건 새책 사이에 들어 있는 출판사 도서목록지였다.

"응.. 응. 근데 그걸 왜?"

"그냥요. 예뻐서요."

너무 흔한 것들이라 뭐 새로울 게 있나 싶어 물었는데, 그 아이 눈에는 예뻐 보였던 모양이다. 그걸 모아서 나중에 벽에 벽지로 사용하면 좋을 거 같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좋은 인테리어 같다는 생각에, 좋은 생각이라고 말해주었다.

진아는 책 정리를 하다 조용히 다가와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다.

"선생님, 이 책 보셨어요?"

손에 들린 책은 유치, 초등 저학년이 보는 그림책이다.

"응... 봤지. 너도 읽었니?"

"네. 너무 재미있어요."

"맞아, 이 사람이 쓴 책 여기 또 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자꾸 책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기에 봇짐장수 보따리 풀어놓듯 책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렇게 진아와 책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진아는 내가 처음 보는 그림책도 자주 들이밀었다.

"선생님, 이 책 읽어보세요. 제가 강추해요."

그렇게 진아 덕에 몰랐던 책도 읽게 되었다.


가끔 진아가 책 정리하는 모습을 보면, '시간을 즐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 정리를 '일'이라고 생각하면, 북트럭에 가득 쌓여 있는 책을 볼 때 답답함이 밀려올 것이다. 얼른 저걸 정리해야 내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생각을 하게 되고, 빨리빨리 정신없이 책을 꽂는 데만 열중하기 마련이다. 실제 청소년 중 열의 아홉은 그렇게 봉사를 한다.

그런데 진아는 그렇지 않다. 북트럭에도 책이 가득, 정리하려고 빼놓은 몇 권의 책도 서가 위에 가득 쌓여 있는 걸 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진아는 정리하던 책 중에 마음에 드는 책을 들여다보느라 자신의 일을 잊은 듯하다.

'쟤는 저걸 언제 정리하려고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정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새 눈을 들어보면 깔끔하게 책 정리를 끝내 놓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확하게. 느림의 미학이 저절로 이해가 되는 광경이랄까.


청소년 봉사도 시험기간 동안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진아는 그런 거에는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

"진아야, 너도 시험기간인데 안 나와도 돼."

"아뇨. 저는 상관없어요."

"정말 괜찮아?"

"시험기간에 반짝 공부한다고 뭐 달라지나요. 히히."

"푸하하하."

명답이다. 한방 맞았지만 유쾌하게 한참을 웃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진아 성적이 어떨까 걱정을 하긴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간, 기말고사를 치르면서 진아 성적은 올랐다.

어느 날 진아 친구들이 와서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진아는 벌써 방학 숙제 다 끝냈대."

"아니 방학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벌써?"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주고받는다.

"원래 진아가 성실하잖아."

"좋겠다. 진아는..." 


진아는 겨울방학이 끝난 후. 3월이 되면서 다시 봉사를 시작했다. 물론 순수 자원봉사였다. 이미 봉사시간은 120시간을 초과한 데다가 작년 10월부터 순수 자원봉사를 시작했었다. 하루는 봉사를 끝내고 가면서 묻는다. 

"선생님, 혹시 옷 어디다 버리세요?"

"응... 옷 수거함에다 버리는데?"

"아, 네..."

이 질문의 의도가 뭔지 헤아리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왜? 아... 진아야, 너한테 줄까?"

그랬더니 진아는 선뜻 "네!" 그러는 거다. 


중3이면 아주 민감한 나이고, 게다가 남이 입던 옷을 입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조금 놀랍기도 하고 해서

다시 물었더니 진짜라 그러는 것이다. 게다가 내 취향과 진아 취향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알았어. 그럼 몇 벌 골라서 가져올게. 그런데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선생님,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골라서 입고 안 맞는 건 제가 버릴게요. 흐흐" 

그날, 진아에게 줄 옷을 찾느라 한참을 옷장을 뒤졌다. 사놓고 입지 않은 옷과 정말 아끼는 건데 작아서 못 입는 옷을 챙겨 왔다.

진아에게 전화해서 언제든 들르라 했더니 진아가 하는 말,

"선생님, 제가 키가 작아서 못 입는 롱코트가 있는데 혹시 입으실래요?"


참, 아름다운 아이다.




나는 결국 새 옷을 사서 진아에게 선물했고, 진아가 준 롱코트는 정말 예뻤는데 너무 커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롱코트를 가져올 때 진아 어머니가 함께 오셨는데 모전여전이라고 마음결이 정말 아름다운 분이셨다.   


* 이미지는 <도서관>(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그림, 지혜연 옮김/시공주니어)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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