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젖을지언정 책은 젖게 할 수 없다
여름 끝을 재촉하는 찬비가 오늘 하루 종일 바람과 함께 내리네요. 안에서 창문으로 내다보며 보는 비는 꼭 눈 같습니다. 보슬비처럼 보이거든요. 그러다 바람소리는 가끔 창문을 부숴버릴 것처럼 매섭게 들립니다. 밖에 나가보면 알 수 있지요. 바람 때문에 우산이 그다지 제 역할을 못해내고 있다는 걸. 전 이런 날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을 더 유심히 보게 됩니다. 전 이런 날에 아무리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다 해도 잘 안 갈 거 같거든요. 집에서 음악 들으면서 차 한 잔 하면서 부침개 부쳐먹으면서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 틀어박혀 책 읽을 거 같아서...
그런데 아이들은 아닌가 봅니다. 물론 평소에 비해 1/2은 적게 오지만 그래도 꾸준히 비바람을 뚫고 오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감탄이 나오고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서로서 그분(어린이)들의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게 되지요. 하... 마음이 그냥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한 가지 딱 안 좋은 게 있어요. 바로 반납하러 가져온 책이 꼭 비에 젖어있다는 겁니다. 가방에 넣어오시긴 하지만 꼭 어디 한 군데는 젖어있기도 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냥 손에 들고 오는 경우가 허다해요. 예전에 한 번은 어떤 아이가 비에 쫄딱 맞혀와서 책 전체가 쭈글쭈글해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말하죠.
"이런... 얘들아, 책이 비에 젖었구나. 비올 땐 꼭 가방에 넣어오거나 비에 젖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알았니?"
"네..."
아이들은 그렇게 대답하긴 하지만 표정을 봐서는 그다지 공감하거나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요. 그래도
늘 그렇게 다짐을 받아두어야 했습니다. 사실 비에 젖은 책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아요. 책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다 똑같은 맘이겠지만 책을 함부로 다루는 걸 보면 기분이 매우 불쾌해지지요. 게다가 혼자 보는 책도 아닌데 구겨오거나 뭘 묻혀오거나 찢어오거나 물에 적셔오면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돼요.
오늘 내내 그렇게 젖은 책들을 보며 연신 휴지로 닦아내고 있었는데, 반가운 어린이가 방문을 했습니다. 이곳에 등록한지는 한 달 정도 된 초등학생 남자아이. 첨엔 수줍어서(경직된 듯한 표정) 말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하고 그랬는데, 오늘 그 아이가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도서관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곤 들어오지도 않고 문 앞에 서서 크게 소리치는 거예요.
"선생님, 저 비 다 맞고 왔어요."
"..........."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왜?" 하고 물었습니다. 전 고작 그렇게밖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우산이 없거든요."... 이런, 우문현답이 들려왔습니다.
"왜 안 갖고 왔어?"
"비가 안 오는 줄 알았거든요. 헤헤."
오 마이 갓!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내내 비가 왔는데 안 오는 줄 알고 우산을 안 갖고 도서관을 오다니,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지요.
"그랬구나. 일단 들어와."
그런데 대출대 앞에서 선 그 아이의 한마디 말에 전 울고 싶었습니다.
"근데요, 책은 안 젖었어요. 헤헤."
<신기한 스쿨버스> 두 권이 그 아이의 윗도리 안에서 나왔던 것이지요.
왠지 형설지공의 애틋함이 느끼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누구는 책을 우산 삼아 머리 위에 쓰고 왔을 법한데...
그 아이 덕분에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 더 발견한 하루였습니다.
* 이미지는 <도서관>(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그림, 지혜연 옮김/시공주니어)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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