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말고 앞으로만 가야 할 때 두려움도 함께 걷는다.
그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루프트한자 11시 20분 비행기를 타려면 이곳 포츠머스에서 새벽 6시 전에 나가야 한다. 2-30분 간격으로 다니는 버스를 제시간에 타야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고, 예약된 버스를 타고 히스로 공항까지 갈 수 있다.
그녀는 일찍 눈을 뜨긴 했으나, 오늘 떠나는 게 당연한 일인 양 아침밥을 챙겨주러 일어난 친구의 태도만 아니라면 다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고 싶지 않다, 가고 싶지 않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지만 입으로 꺼내진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감정을 납득할 이성적 설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왠지 오늘은 가고 싶지 않아. 이상한 기분이 들어.'
동네 마트를 가는 거면 이런 이유로도 충분하겠지만, 여긴 영국이고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다른 날 비행기를 예약하기엔 돈이 없었고, 기껏해야 하루 이틀 더 미루는 정도에 그 많은 돈을 쓰는 건 현명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설명할 수 없는 이 낯선 기분으로 예정된 일정을 바꾸는 건 너무 비이성적이라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제 혼자 대영박물관을 갔다 오느라 긴장하고 피곤해 컨디션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어깨에 가방을 메고, 양손에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문 입구에서 친구의 배웅을 받을 때도, 마음은 계속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에 머물러 있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시간에 쫓겨 정거장에 나갔다. 거리는 어두웠고 차는 오지 않았다. 11월 30일이었다.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서 40분을 기다렸다. 몇 분 후 도착한다는 안내표시가 있었지만 거짓말처럼 버스는 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다는 걸 느꼈지만 그 시점에 오는 버스를 그녀는 묵묵히 타야만 했다. 이미 글러버린 걸 알면서 내딛는 발걸음이라...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더 이상한 건 버스에 타기 위해 캐리어를 옮기다가 그중 한 가방의 손잡이가 어이없이 부러져 버려, 바퀴가 있으나 끌고 다닐 수 없게 되었을 때, 불길한 예감이 온몸에 퍼지는 듯해도 자신의 손과 발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버스에 몸을 실었고 버스의 종착점인 터미널에 내렸다는 거였다.
결국 버스는 놓쳤고, 주머니에 돈은 없으니 방법은 다시 친구집으로 가는 거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는데, 친구는 그녀의 속마음은 아랑곳없이 그간 익힌 영국 사정의 노하우를 발휘하며 발 빠르게 택시를 불렀고, 그녀는 택시비를 빌려 간신히 공항 가는 길에 올랐다. 언제부턴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2시간 동안 그녀는 이제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공항에 가서 보딩을 하고 예정된 비행기를 타고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저녁 6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표는 다 끊어놓았으니 정해진 절차대로 진행하면 되는 안전한 귀국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당신은 비행기를 탈 수 없다. 고 직원은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사실만을 전달해보려고 한다. 그녀의 여행 스케줄은 가족과 서유럽 5개국 패키지여행을 마치고, 가족들은 한국으로 자신은 영국으로 넘어가 친구 집에서 유유자적한 영국 생활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프랑쿠푸르트, 프랑크푸르트-영국행 티켓 두 종류를 끊었는데, 여행사에서 두 번째 티켓을 그녀에게 전달해주기로 한 것을 잊었고, 그녀도 얼떨결에 그 티켓을 받지 못한 채 영국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결국 영국 담당 직원은 E-티켓이 없어서 보딩을 할 수 없으니 티켓을 다시 끊어오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문제는 그녀가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영어라는 언어적 장벽 속에서 직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녀는 또다시 돈을 내고 티켓을 끊으라는 건 줄 알고 급히 한국에 전화해 티켓 번호를 받아 다시 보딩 하러 줄을 서야 했다. 긴긴 줄을 타고 다시 제 차례가 왔을 때는 컴퓨터가 다운돼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폭설 때문이라고 했다. 대체 이 상황이 뭔지 제대로 알 수 없는 그녀는 다시 줄에서 물러나 경비원처럼 보이는 젊은 영국 직원에게 사정을 말하고 도와달라고 하자, 저 바깥 줄에 서서 기다리라고 했다. 언제쯤 비행기를 탈 수 있냐고 물으니 게이트가 열렸다는 안내방송이 나올 거라고 알려주었다. 얼굴보고 말해도 알아듣기 힘든데 영어방송을 알아듣고 오라니...
아무리 찾아봐도 도와줄 한국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설 때문에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끊임없이 짐을 부치고 있었다. 자신이 대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모른 채 멘붕 상태에 빠진 그녀는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가겠다고 할까, 그리고 한국에 전화를 걸어 비행기표 살 돈을 부치라 하는 거야. 이런 생각들로 갈팡질팡 하는 사이, 직원이 말한 줄에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가 앞사람에게 이 줄에 서 있는 게 맞냐고 묻기로 하며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오픈 게이트란 말을 듣고 안으로 들어가 다시 보딩을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프랑크푸르트까지 밖에는 짐을 부칠 수 없다는 거였다. 원래는 한국까지 부쳐야 하는데 왜 중간에서 다시 찾아야 하는지 물었으나 직원의 대답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그녀는 어찌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오케이를 하고 말았다. 게다가 가방 무게가 초과되었으니 가방 한 개는 부칠 수 없다는 말에 어이 상실했는데, 보기에도 딱했는지 무게를 줄여보라 해서 결국 뒤에 줄 선 사람들 앞에서 가방을 열어 선물로 산 나무 장난감 상자 두 개를 꺼내 들고 겨우겨우 보딩을 마쳤다. 반은 혼이 빠지고 양손에는 짐을 한 가득 안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공항 심사에서 신발까지 다 벗으라고 하는 바람에 짐을 내려놓고 롱부츠를 벗었다 신었다를 반복하느라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이미 녹초가 돼 버렸다.
사람들로 가득한 실내에 간신히 자리 하나를 잡고 앉으니 그제야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를 뒤지니 12파운드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커피 한 잔. 제일 먹고 싶은 것도 커피 한 잔, 사람들 틈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독일에 도착해서 짐을 찾아 다시 부쳐야 한다는 것도 피곤했지만, 거기서 한국행 비행기를 못 타면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둬야 했다. 돈이 없으니 어디 가서 묶을 수도 없는데... 그런데 이미 발은 내딛고 말았다. 이젠 친구 집에도 돌아갈 수가 없다. 뭐든 그냥 가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비행기를 타기까지 1시간을 더 기다렸고, 비행기를 탔으나 이륙을 하지 않아 3시간을 기다렸으며, 독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7시를 넘긴 후였다. 앉아서 4-5시간 이상을 있었더니 종아리가 퉁퉁 부어 롱부츠를 신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간신히 간신히 종아리를 부츠 안에 구겨놓고 절뚝거리며 짐을 찾고 연결 편 비행기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넓어도 너~무 넓어서 대체 어디서 내 비행기를 확인해야 할지 열심히 찾아야 하는데,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어찌나 강했던지 한 번에 터미널을 찾아낸 그녀는 예약된 비행기 표를 확인했는데, 독일 직원의 짧은 한 마디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당신 비행기는 이미 떠났어!
그 말이 너무도 잔인하게 들려 그녀도 질세라 그건 폭설 때문이라고 말하자,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한국행 비행기는 제일 빠른 게 내일 2시에 있다며 그걸로 하겠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비행기표를 다시 끊고 보딩을 마치긴 했는데, 중요한 건 내일까지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였다.
직원이 숙박장소를 알려주는 곳을 일러주길래 계속 무료냐고 물었는데, 예스라고 대답했다가 뭐라고 의심쩍은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가 하길래, 일단을 알려준 대로 찾아가 숙소를 물었다. 그 직원은 그녀에게 몇 명이냐, 가까운 곳을 원하느냐 이것저것 묻더니 갑자기 가격표를 들이밀었다. 무료 아니냐고 하자, 직원은 눈을 피하며 뭐라고 말을 하길래 그녀는 뒤에 서 있던 점잖아 보이는 외국 중년 여성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자신은 한국사람이고 폭설로 비행기를 놓쳐 지금 숙소를 찾고 있다고 했더니, 외국 여성이 당신은 숙소를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독일 직원에게 다다다다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독일 직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중년 여성은 다시 그녀에게 무료 숙소 지원센터가 2층에 있으니 그곳으로 가보라고 말했다. 언어 장벽으로 어이없게 당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화가 나서 자신을 좀 도와줄 수 있냐고 묻자, 외국 여성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당신 정도면 충분히 잘해나갈 수 있어요."
2층 서비스센터도 줄이 어마어마했는데, 나중에 표를 받고 들어가 앉아보니 600번대였다. 10개 넘은 창구에는 연신 번호가 딩동거렸고, 그녀 차례가 오려면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자리 하나를 찾아 앉고서야 그녀는 이제 살았구나 생각했다. 지금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했다. 그제야 입구 쪽에 엄청난 양의 음료와 먹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을 갔다 왔고 간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가방을 열어 노트를 꺼내 그날을 기록했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해냈다는 기쁨이 눈물이 되어 내렸다.
이제 사람들은 거의 빠져나가고 거의 끝자락에 있던 그녀의 번호가 딩동거렸다. 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왜 왔느냐 어디서 왔느냐 등등을 묻더니 표를 내밀며 로비로 나가 택시를 타고 이 호텔로 가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녀는 너무 당황했다. 앞서 간 사람들이 항공사에서 준비한 셔틀버스를 타고 7-8명씩 가던데 왜 자신은 느닷없이 택시를 타고 가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꾸역꾸역 주어진 용지를 들고 너덜너덜해진 몸을 끌고 1층 로비로 내려 가니 출입구에서 한 남자가 들어와 택시를 탈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얼른 짐을 받아 들더니 앞장서 걸었고, 그녀는 밤 12시 넘은 이 시각에 말도 안 통하는 독일인 택시를 타고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아마 소리 없이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거라며 택시에 올랐다.
이상하게도 무서운 게 없어졌다. 지금 자신을 이끄는 건 그녀 자신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어느 곳에서 누군가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의지 같은 건 아무 소용없는 시나리오 속 배우처럼. 그리고 돌아가기엔 너무 와버렸다.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와 이제 뭔가를 시도하는 것도 무의미해졌다며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창밖으로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보였다.
와, 정말 예쁘다!
깜깜한 밤 도로에 하얗게 쌓인 눈만 반짝이는 풍경이 천국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 '내가 이걸 보려고 모진 고생을 했구나!' 생각하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이거면 됐다. 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녀는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 게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호텔 객실을 혼자서 차지하고 아침 조식과 점심까지 푸짐하게 무료로 먹고 택시 타고 공항까지 편하게 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건 드문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공항 대기실에서 그토록 찾던 한국사람들이 거기 다 와 있었는데(그렇게 찾던 한국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동안 한 명도 못 봤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셔틀버스를 탄 사람들은 한 방에 여러 명이 모여 자고 점심은커녕 조식도 자기 돈으로 사서 먹어야 했고, 공항까지 오는 것도 셔틀버스 시간을 못 맞춰 택시를 타고 왔다는 거였다.
그녀인 나는, 그렇게 살아돌아왔다.
여행사 직원은 미안하다며 회를 한 접시 사주었는데, E-티켓이 없는데도 정말 운이 좋았다며 "영어를 잘하시나 봐요.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제가 아는 사람은 영어를 하는데도 붙잡혀 있었던 적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내가 정말 영어 때문에 살아온 걸까? 지인들은 하나같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냐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정말 무모했던 걸까. 영국에 있던 친구는 말한다.
"언니, 나 솔직히 좀 이상했어. 왠지 언니가 평탄하게 집에 갈 거 같지 않았거든. 정말 대박이다! 그게 언니 힘이구나!"
그때 난 인생에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어 여행 내내 우울하던 참이었다. 영국에 있던 친구는 상담사였는데 나에게 '불안해하는 그것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덧붙여 언니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때는 그 말이 막막하고 무책임하게 들렸는데 공포 가득했던 귀국길을 겪고 나니 다시 알게 된 게 있었다.
나는 이성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문제를 회피하기보다 직접 부딪쳐 겪어내고 만다는 것을. 그래서 남들은 편히 가는 길을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해 간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 아니면 돌아가야 하는데 꼭 피 터질 때까지 가서야 아닌 걸 알게 된다고. 나도 아는데, 나도 아는데....이번에도 결국은 겪어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친구의 말처럼 그게 나고, 내 힘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결국 고민했던 문제들이 터졌고 난 당황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 위 사진들은 뉴스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