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늙은 여자
알래스카 인디언이 들려주는 생존에 관한 이야기
“우리는 나이든 사람들을 두고 가지 않을 수 없소.”
사람들도 생존을 위해 이따금 짐승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부족민들도 불필요한 짐 없이 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도록 늙은 사람들을 두고 가기로 한 다.
사람들은 두 늙은 여자에게 죽음을 선고한 것이다.
칙디야크는 여든 개의 여름을 보았고, 사는 일흔 다섯 개의 여름을 보았다. 부족의 무리 중에는 칙디야크의 딸이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를 위해 항의한다면 사람들이 자신과 아들마저도 두고 가기로 결정할까봐 두려웠다.
무리는 떠나고 두 늙은 여자만 남았다.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리자 추위로 두 뺨이 쓰라렸다. 하지만 두 늙은 여자는 ‘뭔가 해보고 죽자.’라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들 중 더 젊은 사가 나무 위에서 다람쥐 한 마리를 발견하고 칙디야크의 어린 손자가 떠나면서 무리의 눈을 피해 놓고 간 손도끼로 과녁을 겨눈다. 그 것은 그들에게 살아남느냐 마느냐를 의미했다.
두 늙은 여자는 따끈한 다람쥐 고기 수프로 주린 배를 채운다.
그 날 밤 두 늙은 여자는 지난날을 돌아다보게 된다. ‘ 나 스스로 일을 한 게 아주 오래전이야. 언제나 나를 돌봐주는 누군가가 있었지.’ ‘늙은이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불평을 해대지. 우리는 먹을 게 없다고. 젊었을 때가 좋았다고 떠들어댔어.’
그 날 두 여인은 너무 늦지 않게 스스로를 추슬러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지식과 기술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두 늙은 여자는 자작나무를 삶고 구부려서 눈신발을 만들고, 눈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잠을 자고, 토끼를 잡기 시작한다. 어느 날 그들은 자신들이 여러 해 동안 보행에 도움을 받기 위해 지팡이들을 줄곧 갖고 다녔다는 것, 그리고 무슨 일인지 이제는 지팡이 없이도 여러 마일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노년기에 들어서 약해지긴 했지만, 칙디야크와 사는 자신들이 힘든 노역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대지가 그 대가로 자신들에게 안락을 준다는 자연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
두 늙은 여자는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연명해 갈수 있었지만 큰 무리와 함께 지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한다면, 마음은 친구를 필요로 하지.’
겨울이 가고 두 여인은 사냥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다람쥐나 버들뇌조 그리고 사향쥐를 잡았다. 또 오래전 부족들이 만들었던 물고기 저장고를 기억해내고는 물고기들을 잡아 그 곳에 저장해두기도 했다.
한편 두 늙은 여자를 버리고 떠났던 부족의 원 무리들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그 다음 해 겨울이 왔을 때 두 늙은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
부족 무리들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무리 중에 가장 대책 없고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두 늙은 여자가 실제로는 강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늙은 여자와 부족이 모두 재회한 후에도 두 여인은 지나친 도움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 발견한 독립성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알래스카 유콘에서 태어난 밸마 윌리스의 첫 소설로, 어머니가 들려준 두 늙은 여인과 그들의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 소설이다. 1993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지금까지 약 17개 언어로 번역되어 여러 나라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얇은 책이지만 우리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더 이상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노인을 버려두고 가는 일은 옳은 일인가? 아니면 옳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일인가?
늙은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는 일은 부모를 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방식으로 부모를 돌보는 일인가?
나이든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젊은이들에게 의지하거나 의존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노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
노인들을 대할 때 돌봄과 독립성의 조화를 어떻게 이루는 것이 좋을까?
이 책을 덮으면서 산다는 일과 늙어간다는 일과 죽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떤 큰 힘이 내 안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내 안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