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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줌 Sep 10. 2021

사랑은 책임이다

#철학으로밥짓는여자(11)




<사랑은 책임이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물었다.


“길들인다”는 게 뭐야?


여우가 말했다.


'길들인다는 건 잊히지 않도록, ‘관계를 만든다’라는 의미야.라고.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어린 왕자가 다시 묻는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또 뭐야?


“음 그건, 서로 필요로 하게 된다는 거고,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데?”


“참을성과 공들임이 있어야 해.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며 천천히 조금씩 다가오는 거야. 그것도 시간을 정해서 말이야. 네가 내게 그렇게 하면 나는 어느새 너를 기다리게 될 거고, 네가 오는 시간이 다가오면 너무 기뻐서 안절부절못할 수도 있어. 그리고 나는 네가 오는 시간에 맞춰 마음을 곱게 단장하고 너를 기다리게 될 거야. 길들임이란 이런 거야.”










소설 ‘어린 왕자‘ 중 ‘길들임’에 관한 내용이다. 함께 놀고 싶어 하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함께 놀 수 없는 이유가 ‘서로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여우의 설명을 들은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의 장미꽃이 자신을 길들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 장미꽃을 길들였기 때문에 장미꽃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했다.



요즘은 사랑도 선택이 되는 시대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그게 왜?’라고 반문할 것이다. 사랑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사랑할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내게 오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거야말로 무책임한 행동이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랑할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지사라는 반문이다. 음, 여기에는 나 역시 동의한다. 당연히.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책임감을 수반한 선택이 아니라, 내 이기로 대상을 선별하여 선택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사랑하는 감정은 엄밀히 말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끌리는 감정을 멈출 수는 있지만, 이미 생겨버린 사랑하는 감정을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도 사실 무의미할지 모른다. 즉, 사랑의 감정은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피하며, 나의 능력 밖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끌린다고 해서 마음을 다 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하는 감정이 생겼다고 무조건 들이대지는 않는다. 나에게 맞는 상대인지 살피기도 하지만, 상대가 나를 어찌 생각할지 몰라 자신을 살피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계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무조건 들이대지도, 다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생각하고 신중하고 걱정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보고파하고 지켜보고 엮어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머뭇거리며, 때로는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게 되고, 또 나에게 공을 들인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관계는 이렇게 엮이는 것이다. 이렇게 엮이게 되면, 익숙함과 편안함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실타래를 이어 묶듯 묶이게 된다. 이게 즉 ‘길들여짐’이다. 이렇게 길들여지면 쉽게 누구도 실타래를 풀거나 끊을 수 없다. 설령 한쪽이 실망을 하거나 불편감이 생겨도 섣불리 관계를 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길들여진 관계 안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러니까 이 길들여짐 안에는 사랑 그 이상의 마음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묶여있는 것이다. 그것도 많은 시간을 무언가를 함께 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받아가면서 말이다.



이렇게 길들여진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즉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는 당연히 책임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중요하게. 당연하다. 서로를 책임지는 마음 없이 어떻게 서로를 받아들인단 말인가. 상대에 대한 책임지는 마음 없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자녀를 사랑하는데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듯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책임지려는 마음 역시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니, ‘사랑은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게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설령 그런 사랑을 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을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가끔, ‘사랑’이라 말하고 ‘사랑’을 나누지만, 정작 ‘사랑’의 행위가 끝나면 서로 남남처럼 돌아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을 때면, ‘내가 비정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든다. 누구도 책임지는 사랑을 하려 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며, 나만이 책임지는 관계를 맺고 책임지는 사랑을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지면, ‘그래서 누가 알아주니?’라는 생각에 슬퍼지기도 한다. 그것도 죽어라 책임만 지다 정작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면 더 그렇다.









그러게 말이다. 이 죽일 놈의 책임감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 나와서 이렇게 나를 어려운 사람으로 굳어지게 했는가 말이다. 부모에 대한, 가족에 대한, 형제에 대한,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는 자주 죄책감을 느낀다. 때로 내 책임 밖의 일일지라도 나는 그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는 책임감을 느낀다. 때로 나는 굳이 갖지 않아도 되는 그 책임감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겨우 긁어 그의 몫으로 내어놓는다. 내어놓을 것이 정말 없는데 그의 딱한 마음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도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음을 내어주고, 마음을 받아주고, 마음을 나눈 상대를 위해 때로 나는 나의 전 인생을 걸고 책임을 지기도 한다. 그리고, 책임지기 위해 허덕이다 잃어버린 것들이 떠오를 때면, 내 마음 같지 않은 상대의 반응에 화가 나기보다 ‘죽어라 책임을 다하다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심정으로 가만히 누울 자리를 돌아본다.



그러나 생각 헤보면 책임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또한 책임의 범위 또한 각기 다를 것이다. 그것이 내가 기대하는 범위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오늘 생각건대, 나는 지금처럼 여전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 그것도 책임지는 사랑을 할 것이다. 내 가족과 형제를, 내 아이들을, 그리고 나와 얽혀있는 의미 있는 만남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것이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오늘 어린 왕자의 본문처럼 ‘책임은 지되 내 속도가 아닌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고, 내 기준이 아닌 상대의 기준과 그의 상황과 입장과 생각까지를 고려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서로 길들여진 장미꽃을 위해 죽음이라는 좁은 길을 통과해서라도 자신의 별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어린 왕자가 내게 준 지극히 당연한 교훈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의식으로 체화시키지 못했던 바로 그것 말이다.




#철학으로밥짓는여자 #사랑은책임이다 #유니줌 #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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