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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줌 Aug 31. 2021

선생님, 진짜 멍청하네

#철학으로밥짓는여자(1)


일성지화(一星之火)도 능소만경지신(能燒萬頃之薪)하고,


반구비언(半句非言)도 오손평생지덕(誤損平生之德)이라 (명심보감)




이 말은 ‘한 점 불씨가 넓디넓은 숲을 깡그리 다 태우고 아주 짧은 반 마디의 잘못된 말이 평생 쌓은 덕을 손상시킨다’는 의미로, 아무리 짧은 말일지라도 신중하게 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한 마디 말이 가진 위력을 이보다 더 살벌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이렇듯 한 마디 말이 지닌 위력에 대해 논하며, 오늘은 어떤 한 사람에 대해 말하려 한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란다. 몇 마디 말로 내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그리 큰 인연은 아니었으므로.




수년 전 근무했던 회사의 대표는 내 또래 여성이었다. 그런데 어찌나 까다롭고 제멋대로인지 맞추기가 여간 힘든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새롭게 시작한 일은 아직 서툴고 배워야 할 것도 많아 하루하루가 정신없던 때였다. 비교적 젊은 나이게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대표는 지역사회에서 인지도도 있고 발도 꽤 넓은 편이었다. 대표는 자신감 충만했고 어디서나 당당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슷한 또래라는 생각에 위축되었고, 남몰래 더 눈치가 보였다. 누구에게나 거침없이 요구하고 지시하면서 일관성 없이 제멋대로였던 대표의 성향 때문에 더 주눅이 들었다.




하루는 대표가 일을 지시했고,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내향성에 잔뜩 위축되어 있는 나에게 대표는 지시를 변경하여 다른 일을 지시를 했다. 처음 일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뒤이어 변경해서 지시한 것은 내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매우 즉흥적이었고, 결국 나는 그것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만 정신이 멍해지도록 놀라고 말았다.




“선생님, 진짜 멍청하네.”




아연실색했다.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얼굴이 빨개지며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대표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다음 일을 지시했다. 그리고 다음 지시가 이어지며 상황은 그대로 넘어가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 자신을 판단해보니 내가 좀 ‘멍청’한 건 맞다. 최소한 상대는 진짜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이 MBTI의 직관형(N)처럼 빠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하고 수용하는 속도가 매우 느린 감각형(S)인 나로서는 직관형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까닭이다. 어쨌든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내가 조금 멍청한 건 사실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이 아무리 답답한 직원이라 해도 대놓고 ‘멍청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인격을 의심받을 만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대표를 피해 다녔다. 될 수 있으면 서로 다른 동선에서 일을 하려 애를 썼고,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은 일은 절대 먼저 나서서 맡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직원들이 못 버티고 하나 둘 퇴사를 해버린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대표가 사람을 함부로 대했기 때문이었다. 대표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리고 진짜 문제 되는 일은 그다음에 있었다. 늦도록 회사에 남아 일을 하고 있던 때였다. 대표가 어떤 모임을 같이 가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불렀다. 그즈음 유난히 친밀하게 굴던 대표를 따라 간 자리는 유력한 사람들의 사적 모임자리였다. 지역사회에서 이름 꽤나 있는 그들의 사적인 모임자리는 그냥 그대로 술자리였다. 불편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이곳에 왜 나를 데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대표 얼굴이 있는지라 단칼에 자르고 일어서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들의 꼴을 다 보고 앉아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런데 대표는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더니 그만 취해버렸다. 대표의 얼굴을 봐서 앉아있었지만 그쯤에서 그만 일어서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뉴페이스였던 것이다. 술에 취한 남자들의 관심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대표는 그들과 같이 취한 상태였고 나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대표도 걱정스러웠다. 내버려 두고 혼자 일어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불편하고 불쾌하고 어이없는 술자리가 끝나고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전날 술이 많이 취했던 대표는 그때 상황을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유력한 남자들이 뉴페이스에게 과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 정도였다. 대표는 그 상황을 캐묻듯이 물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묻는 대표에게 어제 불쾌했던 마음을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그런 모임에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대표는 유력한 분들이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것에 분개했고, 몹시 미안해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선생님을 창녀 취급할 수가 있어요?”




그날 나는 열폭하고 말았다. 그녀는 ‘창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한 말이었을까? 그 말이 가진 의미를 이해했을까? 그들에게 분노하고, 나에게 미안해하며 표현한 ‘창녀’라는 단어가 가진 말의 위력을 그녀는 정말 몰랐을까? 전날 유력한 남자들의 무례함보다 백배는 더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감당하기 어려운 분함을 품고도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치욕스러울 뿐이었다.




그일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고, 그때의 대표의 행동과 말 역시 담아두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물론 회사는 진작 그만두었다. 오늘 ‘말’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 명심보감에 기록된 글을 보며 그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 대표가 짧은 말일지라도 말이 가진 위력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겁 없이 내뱉은 그 말들이 지닌 권세를 알았다면 어땠을까? 99번을 잘했어도 딱 한 번 그런 말들로 인해 수고로이 쌓아 올린 덕이 훼손되었고, 공들여 쌓고자 했던 명성이 무너졌음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오늘 나는, 평생을 두고 그녀가 얻고자 했던 ‘존경’이, 그녀가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뱉어버린 그녀의 말들과 함께 깡그리 무너지고, 더 이상 터도 닦지 못할 상태가 되어버린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도하는 바이다. (Wrtten by 기윤희)



명심보감: 고려 충렬왕 때 문신인 추척이 저술한 책

고종황제: 중국의 남송을 세운 왕



#철학으로밥짓는여자 #명심보감 #한점불씨가넓디넓은숲을깡그리다태우고 #아주짧은반마디의잘못된말이평생쌓은덕을손상시킨다 #일성지화도_능소만경지신하고 #반구비언도_오손평생지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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