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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줌 Aug 31. 2021

봄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철학으로밥짓는여자(5)


「상대를 고려한 표현의 중요성에 대해」




괴테는 로마에서 한 무리의 눈먼 걸인들 옆을 걸어갈 때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걸인들 대부분 행인들로부터 거의 적선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유독 한 걸인만이 행인들로부터 꾸준히 적선을 받고 있는 것이 괴테의 눈에 들어왔다. 괴테가 그 걸인에게 다가가 보니,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진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봄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텍스트는 꽤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괴테가 직접 겪는 일인가, 아닌가 가 아니라, 이 문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유이다.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봄'이라는 계절이 가진 상징성이 무엇인가? 봄은 4계절의 시작으로 소생, 새싹, 새 생명으로 대표되는 계절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에서 새싹이 움트면 어디 숨어있었는지 나비가 나타나고 작은 생명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칙칙했던 나무가 파릇파릇 연둣빛 새싹을 틔워내고, 노랑과 분홍 등 갖가지 색의 꽃들이 갑자기 피어오르면 사람들의 옷차림은 화사해지고 봄의 향연이 시작된다. 이 계절은 겨울에 떠났던 작은 것들이 다시 찾아오며 생동감을 회복한다. 또 새로 시작하는 설렘과 생동하는 환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봄에 뭔가를 시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와 따뜻한 날씨 때문에 결혼도 봄에 많이 하지 않던가.



그런 봄날에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걸인은 움터 오르듯 생동하는 계절을 온도로는 느끼지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봄이 왔지만,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문구를 보며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생동하는 기쁨과 환희를 주는 봄의 향연을 그는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감각적인 결핍을 그가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왠지 모를 미안함이 생긴다.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이나 세이브더칠드런의 광고 영상에는,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어떻게도 벗어날 수 없는 제3세계 국가의 어린이나 유아들이 나온다. 아이들의 꿈은 학교에 다니는 것, 그리고 배 곪지 않고 실컷 먹는 것이다. 그 영상을 보며 우리는 현재 나의 상황과 비교하며 안타깝고 불쌍한 생각이 든다. 오늘 내가 먹은 외식비만 10만 원이고, 나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질 좋은 음식을 골라가며 사 먹는데, TV 속 아이들은 한 끼는커녕 어떻게라도 배를 채울 수 있기만을 바라는 현실이 처참함으로 다가온다. 우리 안에서는 ‘왜, 어쩌다 저 나라는 자신의 아이들을 저렇게 처참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저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때 그곳을 다녀온 연예인이 맑고 순한 표정으로, 후원금 1만 원이나 3만 원으로 그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공부까지 시킬 수 있다고 하면, 내 전체 수입에서 3만 원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후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얼른 든다. 3만 원으로 그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상쇄할 수 있다 생각하며 기꺼이 후원을 결정하기도 한다. 어쨌든 나의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그 아이들의 최소한의 필요는 필요충분조건처럼 공통분모로 만나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런 광고는 기본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동정심을 건드린다. 나아가 더불어 건강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 안의 잠자던 인류애를 일깨우는 것이다.



“봄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문구는 사람들 안에 있는 기본적인 동정심과 인류애를 건드린다. 나아가 보편적 동정심을 개인적 관심으로 연결시켜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남들 다 보는 아름다운 봄을 그도 보고 싶다는데 그의 아름다운 욕망의 표현에 발길을 멈추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상황에서 주머니 안에 있는 돈 얼마쯤 적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으로 아름다운 봄을 누리지 못하는 그를 위로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제까지 행인에게는 마음이 없지 돈이 없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누리는데, 그는 내가 누리는 것의 일부도 누리지 못한다는 현실 앞에서, 우리 안의 긍휼함과 이타적 미안함은 자기 주머니를 뒤적이게 한다. 나에게는 크지 않은 돈이지만 그걸로 미안한 마음을 상쇄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성공했다. 걸인으로서, 지나가는 불특정 다수의 기본적인 이타심을 가진 행인들의 마음을 붙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텍스트로 중학생들과 하브루타를 하며, ‘만약 나라면 어떤 문구를 썼을까? 혹은 적선을 받기 위해 어떻게 했을까?’를 물어보았다. 아이들의 대답은 주로 감성에 호소하는 문구였다. ‘감성’이란 그런 것이다. 일반적으로 크지 않는 단순한 선행은 그때 당시 느끼는 감성에 의한다. 반면, 묵직한 선행은 심사숙고가 반영이 되므로 감성보다 ‘이성’적 판단에 의한다. 여기서 눈먼 걸인에 대한 적선은 작은 선행에 해당되며, 그래서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맞다. 국제구호단체를 통한 3만 원 기부 선택 역시 그리 오래 심사숙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오랫동안 기부를 받은 아이가 성장한 현장을 직접 가보는 것은 좀 더 심사숙고가 필요하겠지.



위의 텍스트로 돌아간다. 지나는 행인들은 적선을 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구 내용을 살펴보면, 표현은 YOU-메시지가 아닌 I-메시지이다. 이 문장을 만약 YOU-메시지로 바꾼다면 ‘나는 봄을 볼 수 없지만 당신은 봄을 있습니다.’, 혹은 ‘당신은 앞이 안 보이는 나 대신 봄을 보고 있습니다’ 정도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게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걸인들이 하는 말은 ‘도와주세요’인데, 이 말은 내 입장에서 전달하는 메시지가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메시지이다. 즉, ‘너는 나를 도와줘’라는 일종의 요구 메시지인 것이다. 이 메시지를 대하는 행인들은 부담감으로 적선을 하거나 그냥 지나칠 텐데, 부담감 역시 감성의 영역으로 앞서 말 한 I-메시지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온다.



이제까지 살표본 바와 같이 표현은, 자기표현이든 타인에 대한 의사전달이든 기본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목적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알면 좀 더 효과적인 표현방법을 알 수 있다. 목적의 대상을 안 다음에는 대상에 맞는 표현법을 학습하고, 그것을 고려하여 대상에 맞게 적절히 표현하면 된다. 그렇게 한다면 분명 내가 기대했던 그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할 일 많은 세상에, 할 말 많은 꼰대가, 듣지도 않을 잔소리 대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찬찬히 글을 쓰는 이유이다.



#철학으로밥짓는여자 #봄이왔습니다_그리고저는앞이보이지않습니다 #유니줌 #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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