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순간, 가면을 벗어버릴 용기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관계에 있어 짓누르는 무언가를 마주할 때 더욱 자신을 가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럴수록 얼굴을 감싸고 있는 가면의 무게는 원래의 얼굴을 지워버릴 만큼 강력하게 각인될 때가 있다.
페르소나는 자아 속 또 다른 자아가 들어와 본질을 가려버리며 혼돈을 일으키는 속임수와 같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반복되다 보면 진실에 가깝게 받아들이게 되며 자신도 모르는 본모습을 혼동하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순간, 편안함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예의와 긴장 속에 자신을 놓아둔다. 하지만 말하기 싫은 감정을 노출하고 상대를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미친 거 아냐?라는 눈길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다. 오로지 자신의 본모습 그대로 드러내 보일 수 있을 때 관계의 평온함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피곤한 삶 속에 던져진 현대인들은 수많은 가면을 겹치며 쓰고 있다. 적재적소에 벗었다 하며 갈아 쓰고 있다. 그럴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의 촘촘한 연결망들은 희미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다양한 가면으로 탈바꿈하며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럴수록 삶의 환희는 사라지고 거짓 감정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바람에 이는 잔잔한 접촉이 순간 걸음을 멈추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며 교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누군가 찾아와 내미는 손길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바라보고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상대와 자유로운 공간 속에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매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삶 속에서 얼마나 눈물짓고 한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은 홀로 흐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가면 뒤에 숨겨진 자신의 헐떡이는 모습, 안절부절못하는 안타까움, 떨리는 손길의 흐느낌 등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결국 가면이 걷어졌을 때 남아있는 건 아픈 자신일 수 있다. 병들고 보잘것없는, 초라하고 치료하기 어려운 정신의 피폐함이 대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은 희망사항이 될 수도 있겠다. 하루하루 느끼는 감정 속에는 독약과 치유약이 동시에 담겨있다. 무엇을 바라보고 선택할 것인가? 가면 속에 드리운 자신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