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함에서 벗어난 일

-사랑

by Sapiens

<am.5:50>



집집마다 차가 거의 없던 시절, 걸어 다니는 것이 당연했고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다니던 때가 있었다. 빛바랜 기억 속에도 선명한 자국들이 있다.


그날도 어머니가 어린 나에게 동문시장 입구에 있는 김약국에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특이 또래보다 작은 체구였던 나는 약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서 되뇌며 김약국까지 걸어갔다.


길은 선명한데 약 이름은 또렷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으면서 입으로 말하며 외우고 있는 작은 나의 모습이 선명하다.


저만치 '김약국'간판이 보인다. 사실 그 시절 김약국은 제일 유명하고 컸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 지금은 약사였던 분들을 나는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불렀었다. 건물 안에는 대여섯 명의 아저씨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들에게 약을 전해주거나 팔고 있었다.


약국을 들어서는 순간,


"아, 우리 영희 왔구나?"

유일하게 나를 귀여워해주신 아저씨가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아저씨는 손짓을 하더니 뭐 사러 왔냐며 묻는다.


'어머나, 이를 어째.'

방금 전까지도 입에서 외우고 있던 그 약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에게 아저씨는 씩~ 미소를 지으시며


"영희야~ 영희야~ 무엇을 사러 왔느냐? "

하면서 산토끼노래의 가사를 바꿔서 나에게 시간을 배려해 주셨다. 바로 그때 나는


"아! 아스피린요."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말해버렸다. 아저씨는 알아들었는지 뒤쪽에서 작은 상자와 함께 박카스 하나를 꺼내 들고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셨다.


"우리 영희 심부름도 오고 많이 컸네. 이것은 선물이야."


어린 나의 두 배가 넘는 키에 인자하신 아저씨가 기억나는 아침이다. 항상 나를 이뻐해 주고 살뜰하게 보듬어주신 아저씨.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크게 느껴졌던 어른들의 모습 중 따뜻한 기억 중 하나이다. 그때는 몰랐다. 어른이라고 모두 똑같은 어른이 아님을.


지금은 안다. 그 아저씨는 정말 어른이었음을. 작은 고객을 살뜰하게 대접하시던 마음이 소박했다는 사실을.


그날 그 순간, 나는 혼자 어쩔 줄 몰라 한참을 아저씨가 불러주는 노래가 아니었다면 뒤돌아 나왔을지도 모른다. 아저씨의 배려가 내 마음속 고이 접어 새겨졌다. 그 아저씨도 나처럼 작은 키였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어왔던 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어린 작은 손에 걸린 비닐봉지에 담긴 박카스는 집에 계신 어머니에게 드릴 또 하나의 선물이 된 채로.


사랑은 돌고 도는가 보다. 누군가가 베푼 배려와 사랑은 고정되지 않고 또 다른 누군가의 심장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렇게 어린 나는 사랑을 체화해 갔다.


김약국은 나에게 소중한 장소이다. 그 안에서 지낸 작은 아저씨 덕분에 나의 어린 시절은 특별했다. 누군가 내민 작은 손길이 어린 나의 품속에서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내 삶은 행복함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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