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하고 빛바랜 사진처럼 안개 낀 영상이 펼쳐진다. 선명한 기억은 아니다. 하지만 그날의 시간 속 펼쳐지는 일상은 사뭇 진지하게 박제되어 내 기억 안을 채우고 있다.
올레 밖 서 있는 어린 소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절대 뒤로 돌아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에 소녀는 한참을 서성거리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의 끝에는 커다란 하얀 상여가 동구 밖 오르막길을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어린 소녀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남겨진 소중한 한 컷의 장면이다. 지금도 50여 년 전 있었던 그날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그 시절 어린 소녀와 동행하고 있다. 소녀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마지막 떠나는 그 모습만큼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죽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 속에 던져졌다.
어린 소녀는 ‘죽음이 무엇일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럼 나는 무엇이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에너지를 소진했다. 삶의 본질적인 질문 속에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항상 침묵 속에 지내고 있었다.
자신의 자아 속 또 다른 자아와 격렬한 토론을 할수록 미로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듯했다. 안개가 자욱한 터널 안에 혼자 던져진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 말수가 적어지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자세로 변해갔다. 어린 소녀의 관찰 대상이 된 것은 다름이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살아가는 일상 속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삶의 본질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소녀는 죽음이라는 고뇌 속에 빠져 블랙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사고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아들러는 어릴 적 첫 기억이 자기의 삶 속에 내재화되어 현재 생활양식의 모태로 기능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어린 소녀의 아버지에 대한 부재가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야 자신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소녀에게 일상이 되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과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의 가치관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소녀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질병과 죽음, 형제간의 불화 등 수많은 부딪힘을 겪으며 일어나는 상황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 에 따라 자신 앞에 벌어지는 결과는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삶의 수많은 통증이 자신을 성장시키는 특효약이 되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탄탄한 딱지가 되어준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어른이 된 소녀는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과는 다르게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며 죽음이란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이후 죽음을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축복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었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지옥일 수 있다는.
순간순간이 주는 일상의 소소함 속 숨어있는 행복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 세상도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년이 된 소녀는 이 순간 펼쳐지는 지금이 선물임을 느낀다. 소중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