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고 가는 것들이 많다. 미움, 상처, 집착, 크고 작은 고민들까지 매일매일 생성되는 감정들이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분별과 확증편향들을 하며 수많은 감정들을 만들어낸다.
지구온난화로 뜨거워지는 지구처럼 작은 두뇌 속 수많은 상념과 고뇌들로 혼돈 속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수많은 부정적 감정들을 놓아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 내면의 일상은 자유로움으로 풍요로울 수 있을 것이다.
지난날들을 떠올려보면 나도 그랬으니까. 사회적 성공의 의미를 쫓으며 앞만 보고 달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때, 나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생각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말이 떠오른다. 주체적인 삶을 살 때 우리는 노예가 아닌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리를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중생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참 앎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던져주는 종교이다.
불교서적을 읽을 때마다 관점의 전환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게 깨달음이고 부처의 가르침이라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 모든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면 좋은 대학을 가길 바라며 자녀의 학창 시절을 감정의 쓰나미라는 번뇌 속에서 살아간다.
대학을 가고 졸업을 하고 나면 취업이 기다리고 있으며, 결혼, 육아... 등 끝없는 자녀의 삶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일구어낼 수 없게 된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일들이 자녀들을 사회적 불구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른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욕심에서 불러오는 것들이다. 욕심으로 가득 차 사리분별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 이러한 욕심을 그만 내려놓기로 했다. 내려놓기까지 많은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깨닫는 것은 어느 한순간이었다.
매일매일 우리 앞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머리를 한데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너무도 단순한 원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그 대가를 치러내야만 했다. 아픔이라는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라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시간이 되어 준다.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지혜로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욕심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마음이 평온하고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내 인생에서 그만두길 참 잘한 일이다. 오십의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사실을 알고 자유로운 삶을 항해할 수 있어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각자의 삶을 스스로 넘어지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 나에게 아픔이 오면 어떤 깨달음의 선물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욕심이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탐진치의 모습이다. 탐진치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