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소녀

-감수성

by Sapiens


비와 소녀

sapiens

K는 여고 2학년이다. 그녀의 여고 시절에는 교복을 입다 얼마 되지 않아 교복 자율화가 되어 사복을 입기 시작했다. 한참 여학생들이 사춘기로 감수성이 예민하던 때여서 그런지 교복 자율화가 되자, 어떤 친구들은 한껏 멋을 부리기도 했다. 반면 패션에 관심이 없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선머슴처럼 체육복 바지 기장을 돌돌 말아 입고는 당당하게 나름의 멋을 추구하며 다니던 친구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공통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과 음악 신청을 보내는 것이었다. 경쟁하듯 우린 라디오 방송국에 사연을 보냈고, 보낸 사연이 뽑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다음날 학교에서는 그 이야기로 종일 친구들의 입방아에서 오르내렸다. 그렇게 K의 여고 시절은 소녀들의 재잘거리는 시끌벅적한 공간 속에 사춘기 절정의 소녀들과 공존했다.


하지만 그 외 딱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언제부턴가 모르지만, K는 자아 속에서 여러 자아가 꿈틀거리며 자신을 조종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한 생각과 행동들이 예전과 사뭇 다른 사고와 감성으로 자신을 이끄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 이런 감정이 성장이라는 것일까.


그날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이후부터 내린 비는 6교시가 되어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장대비처럼 더 요란스럽게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질풍노도의 사춘기 청소년들의 반항이라고나 할까.



학교 정문 앞이 버스 정거장이라 친구들은 하나, 둘씩 가방을 머리에 이고서는 초고속으로 달려 나가 시내버스를 골라 올라타고 있었다. 그때는 셔틀버스가 없던 때라 모두 시내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K는 한참을 1층 교실 끝 처마 밑에서 머뭇거리다가 버스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버스 안에는 옷과 머리가 젖은 친구들로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습한 기운으로 버스 안에서는 쿰쿰한 냄새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간 K는 답답함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갑자기 이 장대비를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섯 정거장도 더 가야 내릴 곳이며 그다음은 걸어서 15분쯤 집까지 걸어서 가야 했다. 지금의 K에게는 그따위의 걱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K는 검정 책가방을 오른손에 든 채 비를 맞으며 100m 정도의 학교 진입로를 천천히 걸으며 빠져나갔다. 아마도 미친 사람으로 보였으리라. 아니 실연당한 여학생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K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마치 자신을 위해 비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온몸을 비에 젖히고 싶었다. 온몸이 비에 젖었을 때, 비와 하나가 되었을 때의 느낌이 사뭇 궁금하기도 했다.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이었을까.


장대비가 온몸을 때리고 바람에 뺨을 스쳐 지나가도 K의 마음은 허공에 뜬 듯 젖은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졌다. 내리는 빗소리에 맞추어 자신의 마음이 나대며 이야기하는 소리에 집중해 보았다. 이게 행복이라는 감정일까? 행복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순간 어느 누가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 ‘이 정도의 비는 맞아 보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센티해지는 감정이 올라온다. 비와 교감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온몸으로 비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K 그녀에게 모험과도 같은 도전이었다.


K는 영화의 한 장면 속 주인공처럼, 혼자 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장대비가 내리는 도로 속을 걷고 또 걸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의식되었지만, 창피하다는 느낌보다는 나를 쳐다보는 그들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온몸을 장대비로 샤워를 한 것 같았다. 속옷까지 전부 젖었다. 옷이 젖는 게 무슨 대수인가?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의 두 뺨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의 느낌이 너무도 시원하고 좋았다. 마치 나쁜 기억을 모두 씻어내듯 K는 자신의 뇌가 리셋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지러운 방구석이 깨끗하게 정돈되는 느낌이랄까. 내 생애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가방은 인조 가죽 가방이라 책은 젖지 않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일생일대의 경험을 하며 K는 성장해서 오늘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절대 잊지 못할 추억 하나를 만들었다. 그 순간 혼자만의 비밀을 만든 것처럼 흥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께서 K의 몰골을 보고는 기겁을 하셨다. 왜 이렇게 비에 홀딱 젖었냐고 하시며 눈이 동그라지셨다.

“학교에서 비를 맞으며 걷고 싶어서 걸어왔어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K를 보며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놀라시며 감기에 걸린다고 얼른 수건을 챙겨 주셨다.

오늘은 평생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이다. K는 생각했다.


'내 인생을 사랑한다 ‘고.


K는 여고 시절의 한순간을 가슴속 깊이 접어두었다. 행복한 미소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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