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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

-건조기

by Sapiens




오늘도 난 네모난 통 안에서 돌고 돌며 온몸의 습기를 배출하고 있다. 계속 돌다 보면 서로 얽히고설키며 누가 누군지를 분간할 수가 없다.


예전이 좋았다. 볕이 좋은 날 우리는 가는 줄에 의지해 매달려서 틈틈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따스한 햇살에 몸에 찬 습기를 제거하던 시절,


세상이 편리해졌다지만 난 가끔 옛날 그 시절이 그립다. 요즘에는 미세먼지들도 한몫을 하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은 엄두도 낼 수가 없다.


지금 마루에 있는 건조기는 몇 시간째 돌고 있다. 간간이 들리는 돌아가는 소리는 또 다른 소음이 되고 있다. 하지만 더욱 그리운 것은 햇살에 말린 포근함이다. 그 포근함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은 정말 아쉬운 잊힘이 되고 있다.


그리고 건조기가 제대로 청소되어 있지 않으면 곰팡이 냄새가 우리에게 베어 불쾌감을 주기까지 한다.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건조기가 생활에 도움은 되고 있지만 이러한 단점들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고민 따위는 없었다. 비를 맞아도 쾌쾌한 냄새 따위는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냄새를 없애기 위한 온갖 향을 판매하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향을 사다 넣어 함께 세탁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베인 향을 맡으며 사람들은 부드럽고 좋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가? 세상이 인간들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인간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생각하지 않는 기계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건조기 안에서 뜨거운 온도를 참으며 급건조되는 우리는 비참하다. 누구에게도 푸념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우리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건조기 앞에 앉아 유리 너머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우리 또한 ‘누군가의 조종 속에 살아가는 반주체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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