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일벌과 여왕벌

우리 영감은 저 일벌이나 마찬가지야

by 연오랑

병실 자동문이 열렸다.

휠체어를 탄 할머니는 미스코리아들처럼 머리에 큰 웨이버를 주어 왕관만 쓰면 마치 여왕 같아 보이는 스타일이다. 걸친 옷과 액세서리는 또 어떤가? 여느 재벌 집 마나님이 이 같은 치장을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부티가 줄줄 흐른다. 신라의 선덕여왕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여왕의 말년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휠체어가 내 침상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창가의 침상이다. 4시간의 투석시간이 지루할까 봐 다른 환자들이 양보를 해 준 자리다. 어느 날 어쩌다 창가 침대에서 투석을 받게 된 할머니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다. 평소에는 투석이 시작되면 잠을 청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날만은 투석을 받는 4시간 내내 잠을 청하지 않고 연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 할머니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봐요?”

하지만 할머니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않았다.

마칠 때쯤에서야 할머니는 짧게 한마디 말을 뱉었다.

“ 이 자리가 나는 제일 좋아”

할머니가 유난히 창가 자리를 좋아하는 데는 다이 유가 있었다. 창밖 가까운 곳에는 꽤 규모가 큰 도시 숲과 공원이 자리하고 있어 늘 온갖 새들이 날아와 제잘 거린다. 또 간혹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심심할 틈이 없다.

더군다나 이 공원은 할머니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서린 곳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20여 년 전 이 병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만났다.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당뇨병을 앓고 있어 정기검진과 약을 타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을 때다.

진료비를 계산하는 창구에서 할머니는 조금 모자라는 진료비로 인해 병원 직원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모자라는 진료비를 선뜻 내주며 창구직원을 나무랐다.

초면에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도 못한 체 할머니는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그제 사 “ 그럼 다음에 차나 한잔 사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할머니는 다음 진료 날 눈이 빠지도록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지난번 빚진 진료비를 갚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후로도 오래 동안 병원에 나타나질 않아 만날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10여 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병원 진료를 마친 할머니는 창구 앞에 서있는 남자분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로 그 할아버지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할머니는 수줍게 할아버지께 인사를 건 냈다. 그러자 할아버지 입에서는 예상 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 지난번에 차 한 잔 사기로 하셨죠?”

두 사람은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서로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두 사람은 병원 진료 때마다 인근 바로 그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데이트를 즐겼다.

할아버지는 당시 50대 중반의 이 도시에서 가장 큰 회사에 다니며 정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었고 할머니 역시 40대 후반으로 꽤 규모가 큰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두 분은 만난 지 2년여 만에 부부가 됐다. 상처를 한 지 15년째인 할아버지와 처녀로 늙은 할머니가 부부가 되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결혼 후에도 부부는 젊은 부부가 샘을 낼만큼 잉꼬부부로 살았다.

틈이 날 때마다 국내외 여행을 즐겼다. 유럽은 물론 북아메리카 대륙과 동남아, 심지어 호주에까지 여행을 다녀왔다.

하지만 할머니가 회갑을 넘기고부터는 당뇨병이 깊어지기 시작해 급기야 10여 년 전부터는 투석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할아버지는 재산의 상당 부분을 처분해 할머니가 신장이식을 받도록 했다. 할아버지의 신장을 떼 줄 수 없는 여건임을 안 할아버지는 중국으로 건너가 서까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식 수술 6개월 만에 이상이 생겨 또다시 투석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이미 할머니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후였다.

할머니는 모든 일을 체념한 듯 의욕을 잃었고 할아버지도 병시중에 지쳐만 갔다.

할머니는 미안한 마음에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우울증도 날로 깊어만 갔다.

급기야 3년 전쯤에는 할머니가 집에 불을 지르는 일이 일어나 가재도구며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현금과 귀금속도 홀라당 불에 타 다 날렸다. 할머니는 그때 화재로 발에 화상을 입었고 당뇨로 상처가 났지 않아 한쪽 발목을 절단까지 해야 만 했다.

할아버지는 한날 내게 넥타이 선물을 내밀며 말을 걸어왔다.

할아버지는 몇 해 전부터 일자리를 구해 일을 하러 나가신단다. 새벽에 출근했다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깐 나와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다주시고 또 직장에 가 투석을 마칠 때쯤 다시 오셔서 할머니를 모셔가는 그런 일과였다.

할아버지는 많지 않은 월급 대부분을 할머니를 위해 쓰신다. 맛있는 음식은 물론 철 따라 예쁜 옻도 사 입히시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손수 운전을 해 모시고 간다.

요즘 세상에 어느 젊은 부부가 이들만 할까?

어느 날 할머니가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 이유가 궁금해 투석을 마치 자 마자 할머니 침상으로 달려갔다.

할머니가 응시하고 있는 눈 끝에는 나무 둥지 위에 커다란 벌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 벌집 안에는 여왕벌이 자리 잡고 있는지 일벌들이 연신 꿀을 물어다 날랐다.

“우리 영감은 저 일벌이나 마찬가지야”

잠시 무슨 의미인지 몰라 당황했으나 곧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연로함에도 할머니를 위해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는 것이 바로 저 일벌과 같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라 짐작이 됐다.

할머니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주루 룩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한동안 할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과연 지금 그 일벌 역할이라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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