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앗 지진... 안부를 묻다
큰 지진의 공포 탓에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창밖에는 아침 새소리가 요란하다. 새들도 톤을 높여가며 밤새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새들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도 안부는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예의이며 공동체 생활에서는 구성원의 안위를 확인하고 살피는 중요한 일이다. 우리도 지난 시절 가난이 보편화되고 굶기를 밥 먹듯이 할 때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인사가 ‘아침 잡수셨습니까?’였다. ‘별 탈 없으셨습니까?’ ‘ 별일 없 째?’와 같은 말도 같은 맥락의 안부 인사였다. 군대에서 아침 점호를 취하고 밤샘 경계근무 후 옆 사람을 확인하는 일도 일종의 안부를 묻는 일이다. 이는 군에서는 전투력을 확인하고 사회에서는 생산 활동의 노동력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 사람이 살면서 안부가 가장 필요한 시기는 언제일까? 그것은 아마도 일생일대의 큰 재난을 맞은 직후가 아닐까 여겨진다. 왜냐하면 큰 자연재앙 와중에는 서로의 생존을 보살펴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12일로 돌아가 본다. 내가 살고 있는 경주지역에서는 우리나라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인 규모 5.8의 초강진이 발생했다. 과거 신라시대에는 경주에서 규모 7 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문헌에 남아있으나 이 시대를 사는 사람 치고 이 같은 규모의 지진을 겪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도 7시가 조금 넘어 퇴근을 했다. 그날따라 편집국장도 몸이 안 좋다며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퇴근을 한 상황이라 전임 국장이라는 죄로 논설위원인 내가 주요 기사를 확인하고 편집으로 대장을 넘기고 나왔다. 평소대로라면 약 2시간여 뒤면 편집이 완료되고 또 그 시간이면 나는 집에 도착해 전화보고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회사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는 오래간만에 포항까지 장거리 손님을 태운 탓인지 신바람이 나 있었다. 차는 7번 경포 국도를 시원스레 달리고 있었다. 차가 경주와 포항 중간지점쯤을 지날 때였다.
“ 어! 손님, 차 브레이크가 안 들어요. 넓은 길이 왔다 갔다 하는데요. 어... 어...”
운전기사는 ‘어!’만을 외치고 있었다. 그 순간 , "그르렁" 하는 짐승 울음소리와 같은 굉음이 울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지진임을 알았다.
“차를 갓길로 세우세요!” 겨우 기사를 진정시킨 나는 앞으로 전개될 일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지진이 지나갔다고 안심시킨 나는 기사에게 기자라는 신분을 밝히고 차를 빨리 돌릴 것을 주문했다.
“과속은 내가 책임질 테니 최대한 빨리 내가 탄 곳으로 돌아가 주세요”
내 말의 취지를 알아차린 듯 기사는 미친 듯이 오던 길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단 몇 분도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차 안에서는 우선 외근기자들에게 취재지시가 이뤄졌다. 소방서와 시청 재난상황실은 물론 첨성대 등 중요문화재 주변에 기자를 배치했다. 취재는 둘째이고 생생한 현장 사진 확보가 시급했다. 저녁 모임을 하고 있다는 사진기자에게는 옆에 동석했던 사진동호회 친구까지 동원해 시가지와 주요 문화재 주변 피해상황 사진을 확보토록 했다.
편집국 피해상황도 궁금했다. 다행히 심하게 흔들려 불안에 떨고는 있지만 컴퓨터와 다른 기기에 이상은 없다고 했다.
20여분 걸리던 길을 10여분 만에 달려 도착했다. 수중에 가지고 있던 현금이 턱없이 모자라 가지고 있던 현금과 명함을 함께 건네주며 “ 아저씨 미안하지만 내일 근처를 지나시면 언제든지 들어와 나머지 돈을 받아 가세요” 하며 약간의 현금과 명함을 건넸다.
기사 아저씨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빨리 가셔서 열심히 취재나 해주세요. 내일 아침 신문 보면 시민들이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차에서 내리자 길가에는 야단법석이 나있었다. 대로변에는 여기저기서 자동차에 급하게 시동을 거는 소리와 액셀러레이터 밟는 굉음, 음식점에서 뛰쳐나와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 또 전화기를 붙잡고 울먹이는 여학생들까지...
난생처음 겪는 큰 지진의 공포 탓에 말 그대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편집국에 도착하자 아직 진정이 안 된 듯 편집기자들이 일손을 놓고 있었다. 몇몇 어린 여기자들은 아직도 구석에 앉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심 더 불안했다. 왜냐하면 지진에는 항상 전조가 있고 본 지진이 뒤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놀라 울고 있는 여기자들에게 이 같은 말을 한다면 모두 뛰쳐나가기 바쁠 테니까...
나는 몇몇 여기자들을 진정시킨 뒤 서서히 벽에 걸린 그림과 시계를 치우고 유리창에는 박스테이프를 대각선으로 붙였다. 일을 하며 뒤를 힐긋힐긋 돌아보는 여기자들에게는 “혹시나 해서...”라고 했다. 휴대폰으로 ‘경주에서 규모 5.1 지진 발생‘이라는 재난문자가 도착했다.
컴퓨터 시계가 8시 34분으로 변하는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5층의 편집국이 마구 요동쳤다. 온몸의 신경이 쭈뼛해 마비가 오는 느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배운 '지진이 나면 책상 밑으로 들어가 엎드리고 머리를 보호하세요'라는 행동요령은 내 기억 회로에서 멈춰 서 있었다. 이윽고 놀란 편집부 여기자들의 고성이 들렸고 회사 출입문으로 뛰쳐나가는 직원들의 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심장이라 자부해온 내게도 공포감이 몰려왔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여진, 내일자 신문제작을 강행해야 할까? ‘하는 여러 가지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위험하고 불안하다고 독자들이 다른 날 보다 더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신문제작을 포기한다면 실망감은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기자라는 사명감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라 반문하니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간 대구에 있는 인쇄공장에 유선전화를 돌렸다. 신문을 편집해도 인쇄공장에 이상이 생기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경주에서 조금 떨어진 대구 인쇄 공장은 별다른 피해가 없다고 했다.
길거리에서는 바삐 움직이는 119의 사이렌 소리와 시청차량이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대피소를 안내하는 방송이 들렸다.
20여분 후 "그래도 신문은 나와야 하니까…"라며 편집기자들을 독려했다. 훌쩍이며 컴퓨터 자판기를 두들기는 여기자들의 타이핑은 더 빨라졌다. 긴장감은 더 해져 갔으며 사무실 공기는 화초마저 숨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무거웠다.
평소보다 2시간이 늦어진 밤 11시가 조금 넘어서야 편집이 완료됐고 인쇄공장에 필름을 쏘았다. 여기자들의 어깨를 일일이 토닥여주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그제야 집 식구들의 안부를 묻는 기자들의 전화통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며 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전화기 밖으로 흘러나왔다.
소파에 눈을 감고 한참을 기대 있던 내게 편집부장이 책상 위에 있던 내 휴대폰을 가져와 내밀었다.
“국장님! 댁에 전화 한번 해보시죠. 사모님도 많이 놀랐을 텐데...”
눈을 감고 있던 난 전기에 감전된 듯 깜짝 놀랐다.
“아차!”
그제야 집 식구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 이 글은 2016년 12월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