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술 한잔 하고 싶은 날

술이 익어가듯 가을이 익어간다

by 연오랑

어떨 때 술 한 잔 생각나세요?

내가 술을 처음 접한 건 고3 수능이 끝나고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친구 아버님이 이제는 술을 배울 때가 됐다며 고이 간직하고 계셨던 고급 와인을 내주시면서였다.

친구 아버님은 그러면서 한 가지 당부 말씀을 하셨다.

“애들아 술을 절대로 기분이 좋을 때 마셔야지 기분이 나쁠 때는 마시지 말아야 한다”

나는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술을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경우’도 있고 ‘정말 술이 마시고 싶어 마시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사회 초년병 시절, 직장 상사나 선배로부터 술잔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후자는 기쁜 일이 있거나 반대로 정말로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술잔을 들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습기자로 모 지방신문에 입사했을 때의 일이다. 이때의 일과를 보면 아침 일직 출입처를 돌고 점심식사 후에 사무실로 들어와 기사를 작성하면 데스크는 적어도 4,5번은 수정하도록 첨삭지도를 한다. 말이 첨 삭지 도지 그 과정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험한 말들이 쏟아진다. 둘둘 말아 구겨진 원고지를 던지는 일은 다반사이고 종종 재떨이마저 날아다니는 경우도 있으니 과히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나는 저렇게 괴물처럼 변하지는 않으리...”라고 다짐하곤 했다.

이렇게 꾸지람을 들은 날의 퇴근 후 발길은 십중팔구 술집으로 향한다. 특히 2,3년 선배들은 후배들 앞에서 꾸지람을 들은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술집에서 뒤풀이를 하며 풀지 않으면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이 같은 일의 연속이 수년간 계속되는 것이 기자들 세계에서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사를 놓치거나 경쟁사 신문에 뒤쳐진 날에는 말 그대로 전쟁터와 같은 험악한 분위가 연출된다. 편집국장에서 시작해 그 여파는 부장, 중간 데스크, 평기자 순으로 연쇄반응이 나타난다. 참으로 술이 생각나는 날이기도 하다.

정말로 술이 생각나게 하는 날은 따로 있다.

바로 수일을 걸려 취재한 기사, 특히 고발기사가 ‘킬’되는 경우다. 윗선에서 어떤 연유로 그런 결정이 났는지는 모르지만 십중팔구는 경영진과 친분이 있거나, 막아달라는 부탁이 있거나, 경영상 큼지막한 광고건과 연관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날은 경영진과 소신 없는 국장단의 처신을 안주삼아 열심히 술을 퍼먹는 날이 된다.

나는 한 동안 술고래였다. 평기자 시절에는 나 혼자 만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으로 족했지만 직급이 올라가면서부터는 후배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일에도 무심할 수 없어 술집 출입을 이어갔다.

“신문기자는 조간신문과 같이 집에 들어가면 된다”는 것이 한 때 나의 지론이었다.

출입하는 술집에 대해서도 나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주로 가는 선술집은 막걸리와 소주 맥주 정도를 파는 그런 집이다. 기자 월급에 그 이상은 무리이기도 하다.

수년 단골집에서는 술도 안주도 알아서 내 온다. 왜 오는지, 얼마나 마실 건지, 언제쯤 사라질 것인지, 누가 계산할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안다. 박봉의 월급쟁이에게는 이만한 단골집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요정이나 고급 룸에서도 내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 김영란법이 이제야 마련되고 ‘더치페이‘가 거론되고 있지만 나는 벌서 20여 년 전부터 이 ’ 더치페이‘를 실천했다. 접대를 받는 자리이던, 기관장과 상견례를 하는 자리이건 나는 자리가 파할 즈음에는 반드시 주인 마담을 만나 이날 술값을 확인한다. 그리고 1/n의 술값을 지불한다.

후에 자리를 함께 했던 인사들은 원망(?)을 하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요 버텨온

힘이다.

건강을 잃은 최근에는 그저 옛날 추억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지만 지금도 여전히 주치의 선생과 신경전을 벌인다. 다행히 최근에는 마누라보다 더 깐깐한 주치의로부터 음주 허용량을 허락받았다.

소주 2잔이나 와인 1잔, 맥주는 2잔이 허용량이다. 과거에 비하면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친구를 만나도, 취재원을 만나도 첫 잔으로 건배할 수 있고 마지막 잔으로 작별인사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친구 아버님 말씀대로 술은 기쁠 때 마셔야 한다.

기분이 나쁠 때 술을 마시는 것이 습관화되면

십중팔구는 술버릇이 나빠진다.

남자는 술에 취하면 4가지 유형으로 변한다. 우선은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저분해지는 사람도 있다. 또한 꼬꾸라져 자는 사람이 있고 난폭해지는 사람이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사람은 바로 난폭해지는 사람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과 술을 마시다 보면 어느새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뒷일이 지저분해진다.

가장 술자리를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술을 마시면 유쾌해지는 사람이다. 말이 다소 많아지지만 어느 술자리에서나 분위기 메이커가 된다.

나 또한 술을 마시고 싶은 날 술을 마시게 되면 유쾌한 남자로 변한다.

술이 익어가듯 가을이 익어간다. 창밖에는 슈퍼 문이 뜨고

홍엽은 더욱 불다.

이런 날에는 마음 터놓을 수 있는 친구와 술 한 잔 하고 싶어 진다.

남자 친구든 여 자찬 구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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