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빌라 예찬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은 빌라 생활
부부는 살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이 말은 적어도 우리 부부에게는 맞는 말이다. 집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살림집을 보러 다닐 때도 아파트는 그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는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단독주택에서 살아온 터라 아파트라는 공간이 생소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내가 아파트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 집사람이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가 되자 느닷없이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며 조르기 시작하더니 며칠 뒤에는 빌라로 이사를 가자며 수정해 졸라댔다.
그런 집사람에게 나는 “이왕이면 아파트로 이사를 가지”라며 반기를 들었다. 그 이유인 즉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몇 년 뒤 집값이라도 오르면 재테크라도 될 것을 빌라로 가면 집값이 오르기는커녕 오히려 떨어져 나중에 처분하기도 어렵다는 말로 완강히 버텼다.
하지만 나는 곧 집사람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집사람이 빌라로 이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누가 들어도 타당했기 때문이다.
집사람이 가장 먼저 든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대도시 대형 아파트의 경우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아래윗집에는 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고 생활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단독주택에 살아도 이웃과 교류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나 실상은 시골의 경우 할머니 할아버지들 밖에 없어 아이들 또래가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라는 다르다. 보통 2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이 대부분이고 약간의 사교성만 있으면 단지 내 모든 가구와 친해질 수 있다. 아파트보다 좁은 만큼 부딪힐 일 도 많고 인사를 나눌 기회도 많다.
빌라에 이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집사람이 말하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8가구가 사는 건물이 3 동인 빌라단지 안에는 아이들 또래들이 많았다. 놀이터도 넓었고 화단도 넓어 각종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단지 내 주민들 중에는 우리 또래 부부가 많았고 또한 초중고 선생님들이 많이 살고 있어 여느 빌라단지보다 교육열이 높았다.
어느 한 날 집사람은 속내를 털어놨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살림 사는 주부 입장에서는 훨씬 편하다고 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으면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생활이 보장되고 집안에서도 속 옻 바람으로 다녀도 누가 나무랄 사람도 없어 한마디로 지상낙원이라 했다. 대신에 아이들에게는 감옥이요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에게도 곤욕이라고 했다.
빌라에 이사 온 후 우리 부부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부인들끼리 친해지자 자연히 남편들까지 합류하는 모임으로 확대됐다. 주말이나 연휴에는 같이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많아졌다.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고, 아이들을 숙제를 위해 고성 통일전망대로 안보견학을 떠났는가 하면 “외갓집 탐방‘이라는 행사도 기획해 아이들 외갓집도 번갈아 가며 방문했다. 1년 여가 흐르자 아이들은 물론 대부분의 가족이 친동기간처럼 가까워졌다. 우리 부부 입장에서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많은 빌라 생활이었다.
8년 전 우리는 또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빌라 단지 내에서 친하게 지내던 가족들이 하나 둘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들의 공부, 학교 진학 때문이었다. 명문고등학교 옆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아예 진학한 대학이 있는 도시로 이사를 갔다.
이제 우리 부부는 빌라에 살 이유가 없어졌다. 아이들이 다 자라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고 더구나 집사람이 숲해설가로 활동을 하자 나무를 심고 꽃을 심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단독주택이 제격이 됐다.
주변 사람들 중에는 아파트 예찬론자들이 많다. 하지만 이른 아침이면 새들이 찾아와 지적이고 혹시 까치가 날아와 울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준다. 마당 귀퉁이 텃밭에서는 각종 푸성귀가 자라고 가끔은 노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단독주택으로의 이사는 마치 고향으로 귀향한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자주 빌라에 살던 때가 생각난다. 아이들을 잘 키운 것은 물론 그만큼 많은 이웃, 선한 이웃을 사귈 기회가 됐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만큼은 나는 빌라단지를 추천하고 싶다. 나는 빌라 예찬론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