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아버지의 꽃
아버지, 어머니 영전에 받치다
53년 전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연예 결혼을 하셨다.
해병사단에 근무를 하던 27살 총각 중사는 해안가 초소와 방어 진지 구축을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부지런히 호미곶 일대를 들락 날락 하던 그런 때였다. 지금은 포장도로로 변해 연인들의 드라이버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50여 년 전 그 도로는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였을 뿐만 아니라 군용차 말고는 온종일 차라고는 한대도 구경할 수 없는 그런 도로였다. 저녁놀이 들 무렵 아버지가 탄 차량이 동해면 마산리를 지날 즈음 도로변 공터에서 활짝 핀 수국 꽃을 꺾고 있는 앳된 처녀를 발견했다. 잠깐 스쳐 지나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총각의 눈에는 꽃을 꺾고 있는 처녀가 저녁놀 붉은빛과 어울려 마치 천사와 같이 보였다고 한다. 김천 출신의 아버지는 아직 포항 일대의 지리에 어두울 때라 정확한 위치를 몰라 그날 이후 주말이면 혹시나 그 처녀와 마주치지나 않을까 기대하며 수십 리 길을 달려가 그 일대를 배회하곤 했다고 한다.
두어 달 가량 허탕을 친 아버지는 급기야 용기를 내 그 마을 이장님 집을 찾아, 잠깐 본 그 처녀의 인상착의를 이야기하며 ‘이렇게 생긴 처녀를 찾는다’고 하자 이장 아저씨는 아래위를 몇 번이고 쳐다보다 그제 서야 동네 맨 끝집을 가리켜 주며 거기로 가보라고 알려줬다. 아버지는 인상이 후덕하게 생긴 이장 아저씨 집을 그냥 나오지 않았다. 호주머니에 든 뜯지도 않은 담배를 갑 채 내밀며 이왕이면 그 집주인에게 자신을 좀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일종의 중매를 부탁한 것인데 그날 이후 이장 집 아주머니는 팔자에도 없는 중매쟁이가 돼 처녀의 집을 들락거리기를 여러 차례 시도 한 끝에 ‘그럼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는 반승낙(?) 받아냈다. 그때 그 처녀, 아니 어머니의 나이는 19살이었다. 이장이 중매를 선데다 계급이 또래보다 몇 년이나 일찍 진급이 돼 중사 계급장을 달고 있다는 점은 30여 호쯤 되는 시골 어촌마을에 화제가 됐다. 그로부터 6개월여간 아버지는 주말과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해가 긴 여름철에는 어김없이 20여 리를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곤 했다. 당시만 해도 시골 동네에서 젊은 청춘 남녀가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는 한정이 되어있는 데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두 눈 부릅뜨고 감시를 하고 있는 형편이라 주로 데이트는 집 인근 바닷가나 동네 어귀 동산이 대부분이었다.
바닷가 시골 처녀, 어머니는 꽃을 유난히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점을 간과하지 않으셨다. 해가 바뀌고 다음 해 연초 아버지는 급기야 프러포즈를 결심하고 방법을 궁리하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으로 마음을 사로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한 겨울에 꽃을 구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며칠을 꿍꿍 앓고 있는데 마침 사단장 관사 유리온실에서 꽃을 보았다는 한 동기생의 말을 듣고 감히 용기를 내 사단장 관사로 찾아간 아버지는 사모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결과 기꺼이 꽃을 얻은 낸 것은 물론 꽃다발까지 만들어 주시며 대신 결과를 반드시 알려달라고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물론 아버지 어머니의 결혼사진 중간에는 당시 사단장님이 계신다)
부모님은 결혼 후 아파트에는 단 한 번도 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골목과 마당이 있어야 꽃과 나무를 심을 수 있다는 어머니의 취향 때문이었다.
내가 고1 때로 기억한다. 시내 고교로 진학해 주말이면 집에 들리 곤 하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안방 꽃병에 꽃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께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꽃을 선물하며 화해를 청했고 어머니는 또 그때마다 무슨 전리품인양 꽃을 꽃병에 꽂아 놓으시며 시위(?)를 하셨다고 한다.
부부는 살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아버지도 어느새 꽃을 심고 가꾸고는 일이 취미가 됐다.
내가 도회지 대학에 진학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새로 아담한 집을 마련해 이사를 하셨다. 집 주위는 당연히 온갖 꽃들과 나무들이 차지하고 철 따라 꽃과 열매들이 번갈아 자태를 뽐내 곤 했다.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어머니는 새집으로 이사한 지 5년여 만에 간경화라는 병을 얻으셨다.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다 50대 후반에 아버지를 두고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후 몇 해가 지나지 않아 그 많았던 꽃과 나무들을 시들고 아버지의 몸과 마음마저 시들기 시작했다. 설성가상으로 살단 집이 포항공항 확장으로 편입이 돼, 집마저 더 외곽으로 옮겨야 할 지경에 다 달았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일까?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500여 미터나 되는 동네 어귀와 집 진입로에 온갖 꽃들을 심기 시작했다. 새로 생긴 진입로가 언덕 위에 위치해 옛날 연애시절 어머니와 함께 데이트를 하던 외갓집 동네 진입로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 집을 찾은 나는 깜짝 놀랐다. 진입로 양쪽에는 각양각색의 수국과 코스모스, 패랭이, 달맞이꽃, 접시꽃, 범꼬리 꽃 등 수많은 꽃들이 가득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순차적으로 피는 꽃을 심어 사시사철 꽃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아마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옛일을 추억하며 그 꽃들이 활짝 피면 그 길을 따라 어머니가 오신다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아침저녁으로 농사일처럼 꽃을 가꾸시던 아버지마저 지난해 봄, 세상을 뜨셨다. 심어놓은 꽃길에 앉아 자주 담배를 피우시던 것이 화가 된 것일까? 아버지는 폐암 진단을 받으신지 1년여 만에 어머니의 곁으로 떠나셨다.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신 지 꼭 15년 만의 일이다.
아버지는 정신이 조금 남아있을 즈음 병실에서 유언 아닌 유언을 하셨다. 돌아가시면 15년간은 호국원에 있겠지만 호국원에서 자리를 비껴줘야 할 즈음에는 당신이 심어 넣으신 그 꽃들 사이로 어머니와 함께 뿌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도 최근 아버지가 살던 집에 자주 들러 집을 손보고 있다. 마누라가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나도 몇 년 후에는 아버지가 살던 집으로 이사를 하고 싶다. 물론 내년 봄부터는 나도 아버지가 가꾸던 그 진입로 꽃길을 열심히 가꿀 것이다. 생의 순간순간, 삶의 악센트가 필요할 때마다 함께 했을 ‘아버지의 꽃’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리워진다.
*이 작품은 제1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부문 동상 수상작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