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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오랑 Mar 09. 2023

#시가 있는 봄(52)-거울 속 자화상

거울 속 자화상

                         재환

문뜩 창고에 넣어뒀던 거울이 생각났다

서재의 책장 한 칸을 막아주다

내가 병들며 동시에 퇴장한 녀석이다

나는 그 녀석으로부터 위로를 받곤 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도, 화가 났을 때도 그 녀석은

나의 투정은 물론 주먹다짐까지 받아줬다

다음날에는 항상 녀석은 나의 주름살을 선명히 비쳐주며

화를 내지 말라며 타이르곤 했다     

그 녀석과의 인연이 계속될 줄만 알았던 나는

그 녀석의 존재가 귀한 줄 몰랐다

한 번씩 닦아주는 일도 귀찮았고

화가 날 때는 그 자리에 있는 녀석의 존재 자체가 짜증이 났다     

내가 퇴장하고 그 녀석도 동시에 퇴장하면서

나의 연극도, 녀석의 연극도 모두 끝난 줄 알았다

나는 하얀 병원에서, 그 녀석은 어두운 창고에서

내가 병실 밖 신선한 공기를 갈구하듯

그 녀석 또한 얼마나 지루하고 암담한 시간을 보냈을까?

내가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것을 두려워하듯

녀석 또한 창고에서, 세상에서 버림받지나 않을까 얼마나 두려웠으랴     

강산이 반쯤 변할 즈음에 나는 나갔던 집 마당에 다시 섰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섰지만

그래도 자유는 찾아왔다.

내 목소리를 듣고 창고를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녀석은

털끝하나 변하지 않았다     

녀석은 그랬던 것처럼 두 발로 서서 나의 얼굴을 비쳤다

주름이 늘어나고 깊이 페인 흔적도 역 역하다

웃어도 표정이 밝지 않다 아니 웃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병마와 싸우느라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짐작이라도 한다는 듯

녀석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웃는 표정만 골라 보여줬다 

그리곤 한마디 했다

오십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데...

오늘 아침도 녀석이 주문을 한다

“웃으세요. 웃으세요. 크게 한번 웃으세요”

잔소리가 는 것을 보니 녀석도 외로웠음에 틀림이 없다     

아미에 그려진 내천(川), 이마에 그려진 석 삼(三), 볼에 그려진 무릇 범(凡),

이 얼굴을 어찌하랴

나는 도리가 없음을 안다

나의 거울 속에 비친 자화상은 여기까지다

다만 녀석의 소원이 워낙 간절해

혹여나 깊은 주름이 조금이나마 옅어지고

검버섯이 없는 인자한 모습으로 늙어가길 바랄 뿐이다     

욕심일까?

나도 녀석도 기가 찬 지 허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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