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사람에게 사람이 숲에게
'숲 해설가 박 00'
집사람의 명함이다. 10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거실 전화기 옆에 낯선 명함이 놓여 있어 쳐다보다 깜짝 놀랐다.
“숲 해설가라니... 사칭할 것이 없어 별걸 다 사칭하고 다니는구먼. 들어오면 혼을 내줘야지”하며 벼루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기우는 집사람이 들어오자마자 곧 사라졌다. 아니 깜짝 놀라다 못해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랬다 집사람은 내가 무심한 사이 3개월여 동안 열심히 숲 해설가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그것도 버스를 타고 때로는 남의 차를 얻어 타고 포항에서 경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육을 받아 수료식에서 우등상까지 받았다.
사실 내자는 차가 없을뿐더러 운전도 못한다. 결혼한 지가 올해로 24년째를 맞고 있지만 지금까지 전업주부로만 살아왔다.
어느새 40대 후반에 들어섰으니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지켜보기로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3개월 여가 흐른 어느 가을날이었다. 오늘은 휴일이라 늦잠을 푹 자야 지하고 이불속을 뒤적이고 있는 내게 집사람이 같이 갈 곳이 있다며 졸라 됐다. 딱히 나와 동행하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차가 없어 데려다 달라는 소리로 들렸다. 날씨가 너무 좋아 난 나들이 삼아 한번 나가보자는 심정으로 차를 몰고 나섰다. 집사람의 오늘 목적지는 구불구불 오르막길을 달려 집에서 1시간 거리인 경북수목원이었다. 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단풍이 고운 나무 밑에서 책이나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인적이 드문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 집사람은 동료들과 짧은 회의를 마치고 각자 안내할 수목원 탐방객들을 안내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연 잘할까? 잘할 수 있을 까?” 아마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는 심정이 이런 것이리라.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걱정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내 앞을 지나가는 집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20여분이 지났을까. 저쪽 산모퉁이에서 *기가폰 소리가 들렸다. 주위에서 흔히 듣는 경상도 사투리가 아닌 또렷또렷한 표준말을 쓰는 목소리가 내 귀를 쫑긋하게 했다. 계곡 바람을 타고 간간이 들려오는 해설 내용은 재미가 있었고 새로운 것들이어서 어느새 내 발길은 그것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모퉁이를 돌아 찾아간 그곳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낯이 익은, 그것도 집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매일 듣던 목소리를 몰라 본 것은 아마 기가폰이라는 기계에서 흘러나온 기계음 때문이었기도 하거니와 상상도 못 한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그날 난 돌아와 옆에서 잠든 집사람의 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후로도 숲해설가 박 00은 바쁘게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듯했다. 주로 주말과 휴일에 집을 나가는 것이 아이들에게나 내게 조금 불편을 주기는 했지만 점점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위안이 되곤 했다.
명함을 처음 발견한 지 5년 여가 지난 지금. 어느새 우리 가족들의 생활 방식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주말과 휴일이면 어김없이 집사람이 해설하는 현장으로 함께 달려갈 때가 많다. 집안에는 온통 나무와 들꽃, 동물과 곤충, 환경과 생태에 관련된 책으로 가득 찼다. 덩달아 나와 아이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나무 박사라는 소리를 듣게 됐다.
최근 집사람은 2019년 대통령 표창 서훈에 이어 영남대와 울산 생명의 숲 등 숲해설가 양성과정 강사로, 산림청 산림교육프로그램 인증자문단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이론적인 교육을 하는 산림과 교수들 틈에 끼어 주로 실무적인 현장위주의 교육을 맡고 있다.
더구나 유치원, 초등학생에서부터 선생님들에 이르기까지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와 숲과 환경교육에 대해 질문하고 의논하는 것으로 보아 꽤나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하다.
딸아이들의 자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살림만 하던 엄마가 선생님 소리를 듣는 데다 유명인사로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소위 전문가들이 말하는 피톤치드니, 스트레스 해소 기능이니, 심리적 안정 기능이니 하는 숲이 가져다주는 효과들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다.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숲이 주는 효과에 대해 여러 번 읽고 보았다. 정말로 그런 효과가 있는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숲이 집사람에게 생기와 활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절실히 실감하고 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숲이 무뚝뚝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가져다주지도 못하는 남편으로 인해 우울증 증세마저 보이던 집사람에게는 훌륭한 주치의가 되고 있다. 숲은 놀라운 치유효과 외에 우리 가족에게 화목이라는 보너스를 또 하나 더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평범하고 소심했던 가정주부를 숲 속의 요정, 숲 해설가로 탈바꿈시켜준 숲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산다.
늘 가까이에 있어 소중함을 몰랐던 숲이 어느새 우리 가족 모두의 가슴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저 멀리 수목원 입구에 걸린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숲이 사람에게 사람이 숲에게’라는 말이 오늘따라 더 가슴에 와닿는다.
* 허리춤에 차는 작은 스피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