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하는 말은 믿지 마세요(?)
“ 호강은 못 시켜주지만 손에 찬물은 묻히지 않게 해 줄게”
이 말은 남자들이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하면서 하는 흔한 약속이다. 나도 집사람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결혼 생활 25년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까지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나는 분명 거짓말쟁이요, 그 말은 ‘펑크 낸 약속’ 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그 말을 잊어버리고 딴청을 부릴 만큼 뻔뻔하지는 않다. 언제쯤이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런지, 아니면 영원히 지키지 못할 ‘펑크 낸 약속’이 될 런지...
결혼한 지 3년 여가 되던 어는 날이었다. 회사에서 회식이 있어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방안에는 집사람과 연년생 두 딸이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방안 이곳저곳에는 우유병과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까지 집사람은 아이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딸은 키우기가 좀 수월하다는 어른들 말과는 달리 연년생으로 태어난 두 딸은 사내아이들 뺨칠 정도로 별났다.
낮에 별나게 노는 것이야 그렇다 손 치더라도 밤에 서로 번갈아가면서 울어 대는 데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됐다. 둘째가 태어나고 6개월 여가 지나자 집사람은 체중이 38㎏까지 줄었다.
그날도 하루 종일 아이들과 시름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조용히 세면장에서 씻고 냉수를 한잔 마실 요량으로 주방에 들러보니 싱크대 설거지통에는
설거지거리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깔끔한 성격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집사람의 성격상 설거지 거리가 이렇게 쌓인 것을 보니 낮에 얼마나 아이들에게 시달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자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 온 내가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결혼 후 처음으로 설거지라는 걸 해봤다.
결혼 10주년 즈음에는 어머니가 몹시 아파 병원에 입원하고 계실 때다. 간성혼수가 와 정신이 오락가락하실 때였는데 병실을 비울 수가 없는 입장이 됐다. 서울대병원 병실을 집사람과 간병인이 번갈아 가며 지켜야 할 상황이라 매일 새우잠을 자던 집사람은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와야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기다리던 아이들을 생각해 요것조것 반찬을 만들고
또 며칠간 먹을 밑반찬을 만들다 보니 막상 저녁식사 때가 되면 밥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남자는 부엌 근처에도 가지 않아야 한다’는 정형적인 경상도식 교육을 받고 자란 나도 그때만큼은 설거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사람이 아플 경우에는 별도리가 없이 설거지를 했다. 배달문화가 잘도 발달해 있어 대부분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경우가 많으나 그래도 아침은 배달하는 곳이 없어 꼼짝없이 약간의 요리와 설거지는 해야 했다. 그래서 주로 어릴 적에 잘해 먹던 라면 요리가 주종을 이뤘지만 아이들이나 집사람 모두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그래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또 라면은 설거지거리가 그리 많이 발생하지 않는 요리(?)라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쉰을 넘긴 최근에는 또 간혹 설거지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곤 한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던 집사람이 몇 년 전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또 곧잘 승진을 해 바빠졌기 때문이다. 먼 거리 출장이라도 가는 날에는 밤늦게야 녹초가 되어 돌아온다. 아이들도 모두 객지로 나가 두 부부밖에 없는 상황에서 설거지통에 그대로 설거지거리가 담겨 있다면 그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누가 보는 사람이 없어 천만다행이다 “라고 속으로 외치며 고무장갑을 끼게 된다.
“손에 찬물은 묻히지 않게 해 줄게”
이 말은 비단 정말로 손에 찬물을 묻히지 않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만큼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지만 결혼 생활은 그렇게 녹녹한 것만은 아니다.
만약에 집사람이 이 말을 늘 되뇌고 엄격하게 해석해 약속을 지키라고 주장한다면 결혼 이후 평생 한 번도 지키지 못한 약속이니 만큼 상당히 난감할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안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언제나 남자답게 약속을 지킬 수 있으려나...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시원한 담은 없다.
내가 싱크대 앞에 서는 것은 ‘펑크 낸 약속’이 마음에 걸려 그 말을 나 스스로에게 엄격히 적용해 보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약속을 펑크 내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밤늦은 설거지를 한다.
“앗! 쨍그랑”
또 접시 하나를 깨고 말았다.
깨지는 것은 약속 말고 접시 하나가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