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즐거운 심부름은 막걸리 심부름
어릴 때 심부름을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도 형제가 없는 외동아들이라는 이유로 집안 심부름은 도맡아 놓고 했다. 특히 어머니는 내게 심부름시키는 일을 미더워했고 나는 그때마다 적당한 보상을 해주시는 어머니가 좋았다.
많은 심부름 중에 내가 가장 기다리고 즐겁게 다녀왔던 심부름은 막걸리 심부름이었다. 요즘 같으면 어린아이에게 술 심부름을 시키는 일은 금기(?) 중의 하나이나 40,50여 년 전 그 무릎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무엇보다 막걸리 심부름은 수입이 짭짤했다. 집에서 막걸리 양조장까지는 왕복 1㎞정도 되는 비교적 먼 거리였으나 심부름 뒤에는 항상 자투리 거스름돈이 5원 정도 남았고 어머니든 아버지든 거슬러온 잔돈은 “네가 가져라”고해 내 차지가 됐다. 그 맛으로 나는 간혹 주말이나 휴일이면 나 스스로 “어머니 심부름시킬 것이 없어요?”라며 심부름을 자처하기도 했다. 또 한 가지 막걸리 양조장 심부름을 반기는 대는 양조장 아저씨가 한 움큼 집어주는 맛있는 술밥과 2되짜리 막걸리 통에 넘칠 듯 가득 담아주는 푸짐한 양에 있었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즈음에 막걸리를 흘러 넘 칠 것 같다는 이유로 홀짝홀짝 한 모금씩 맛을 보는 술꾼(?)이 되었다. 한울타리 안에 6가구가 살다 보니 막걸리 파티도 자주 열려 5원씩 받아 모은 심부름 값은 저축하는 기쁨을 줬고 초등학교 졸업쯤에는 어느새 몇만 원이 모여 당시로는 귀한 손목시계를 장만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서는 간혹 한 집에 살던 여고생 누나에게 전해 달라는 이웃동네 형들의 연애편지 심부름을 하면서 용돈을 톡톡히 얻어 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나의 인기는 대단했다. 훨씬 한 키에 공부도 잘해 지역의 명문 P여고에 다녔으니 형들의 구애는 끊이지 않았다. 간혹 누나도 편지를 전해 달라는 남학생이 궁금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키는 큰지, 피부는 뽀얀지 등을 물어 애를 먹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누나는 형이 심부름 값을 줬다는 말에도 들은 체도 않고 눈감아 줬다. 나는 그때 우리나라 편지 봉투도 이렇게 아름답고 다양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성인이 되어 군대 생활을 할 때도 심부름은 이어졌다. 보직이 포병부대 서무계 일을 맡아하다 보니 전령 임무를 수행할 때가 많았다. 이 일 역시 바깥 우체국에 나가 사서함으로 보내온 편지를 수령해 다가 포대원들에게 나눠주는 일이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애인에게서 온 편지를 전달할 때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내가 연애편지를 받은 듯 기뻤고 부모님 상을 당했다는 전보를 수령할 때는 어떻게, 무슨 말을 하며 전해줘야 하나 고민이 될 때가 많았다. 나는 그때마다 인사참모를 설득해 여유 있는 휴가증으로 대신했다.
결혼을 해서도 끊이지 않던 심부름이 쉰을 넘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딸만 셋을 뒀다는 죄(?) 때문이다. 특히 해가지고 난 후 심부름은 딸들에게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소한 심부름까지 도맡아 놓고 한다.
가장 많은 심부름은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 일이다. 운전을 못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최근 승진을 해 바쁘다는 이유로 집사람은 내게 장보기를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요령을 부려 볼 참으로 “슈퍼 계산대에 멋진 아주머니들이 많다”는 둥 “ 아주머니들이 나를 홀아비로 알고 잘 대해 준다” 는 둥 너스레를 떨어 보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그러면 경사지”이다.
하기야 밤길에 과년한 딸을 내놓고 노심초사하느니 차라리 내가 나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심부름은 어릴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나 심지어 나이가 들어서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삶이 어차피 어울려 사는 구조이고 가족 간에는 내가 안 하면 누군가는 해야 할 일들이 대부분이므로 내가 하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 대형마트에서 보았듯이 생리대를 사 오라 한다며 투덜거리며 가던 30대 남자의 꼴은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심부름하는 남자. 우리나라 쉰을 넘긴 남자들의 일상이니 받아들여야 할지. 박차고 나가야 할지...
오늘도 헛갈리는 하루다.
* 이 글은 2020년 11월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