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눈물

by 연오랑

사람은 기쁠 때 또는 슬플 때 눈물을 흐린다. 추측컨데기쁠 때 흘리는 눈물은달고슬플때 흘리는 눈물은 짠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그럼 고마울 때와 미안할 때 흘리는 눈물의 맛은 어떨까?
나는‘남자는 눈물을 자주 흘리지 않아 야한다’ 고평 소입 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말씀대로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 보통 남자는 군에 입대해 훈련소에서 고된 훈련이 끝난 후 부모님 생각, 고향생각이 나게 끔 조교나 교관들이 자극을 하면 눈물을 흘린다. 또 대형참사 가나 유족들이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런 때도 눈물을 한 번도 흘려 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감정이 메말랐거나 성격이 매몰차다는 이야기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무섭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이런 류의 사람이 주위에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 중에 하나다.
술을 좋아하던 어느 한때의 일이다. 같이 술을 마시던 회사 동료가 3차로 들린 술집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머리를 크게 다친 그 친구는 피를 흘리며 곧 쓰러졌고 일행 모두 인사불성직전일만큼 취해 있는 탓에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우왕좌왕했고개중에는 이미 포기나 한 듯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동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난 가는 택시를 가로막아 세 워먼저탄 손님에게 양해를 구해 내리게 한 후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택시를 탄 10여 분동 안 나는 그 다친 친구가 잠에 빠지지 않게 뺨을 때리고 가슴을 두들기며 응급실에 도착했다. 그 친구는 2주 전에 갓 결혼한 새신랑이라는 것을 알기에 순간 결혼식장에서 즐거워하던 신부의 모습이 떠올라 더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친구는 4시간의 응급수술 끝에 깨어났다. 나마저 눈물을 흘리며 당황했다면 그 친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한께술을마신 우리는 평생 새신부의 원망을 받으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나의 냉정함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 아버지도 평생 2번의 눈물을 흘리시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광경을 아버지는 본 사람이 없을 것이라 믿고 계셨겠지만 나는 우연찮게 그 광경을 보았고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것도 뒷마당 한편에서 혹시 남들이 볼까 몰래 숨어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35년 전쯤의 일이다. 직업군인으로 군생활을 오래 하던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고 첫 사업에 도전하셨다. 퇴직금에 다 틈틈이 모은 돈으로 장만했던 시내 중심지 땅마저 처분한돈을밑천삼아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생산라인을가진벽돌공장을시작하셨다. 아직 손으로 두들기며 시멘트 블록을 찍어내던 시절, 부산에서 개발했다는 자동화 기계를 도입, 비교가 안 되는 단단한 시멘트 블록을 찍어낸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블록 주문은 매일같이 쏟아졌다. 야간작업은 물론 일요일에도 공장을 돌려야 주문량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호황을 누렸다. 나는 물론 어머니와 가까운 친척들까지 동원해야 납기를 지킬 수 있었다. 호황을 누리던 어느 날 공장을 2개 월여를 연속으로 돌려야 가능할 만큼 의 주문량이 들어왔다. 사립학교 2군데의 담장을 모두 교체하는데 필요한 블록 양은 트럭으로 어림 잡아 300여 대분량이었다. 일이 제대로 끝나면 말 그대로 시골 재벌이 되는 일이었고 좀 더 싼값에 시멘트, 모래등 자재를 매입해야이 문이 많다는 생각에 현금을 모두 동원해 자재를 사고 벽돌과 블록을 생산했다. 하지만 공사가 다 끝난 뒤에도 결재를 미루더니 급기야 공사업자는 부도를 내고 자취를 감췄다.
덕분에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뒤두 달까 량을 사람을 찾으려 그리고 술로 세월을 보내시던 아버지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동네 한복판에 횟집 식당을 하겠다고나 선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녀시절 어촌에서 자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횟집이 가장 손쉬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바로 그 개업식날 아버지는 축하해주기 위해 찾아오신 손님이 권하는 술잔을 받아 드는 어머니를보고울꺽참을수가 없어 뒷마당으로나가몰래눈물을 흘리 셨던 것이다.
짐작컨대연예시절청혼을할 때“평생 고생을 시키지 않겠노라”다짐을 한 듯한데 막상 상상도 못 한식당을 하게 해 손님 응대를 하게 됐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짐작만 할 뿐이다.
그 후 3년여 뒤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하신일은 어머니의 장사를 그만두게 하는 일이었다.
2번째 아버지의 눈물은 그로부터 40여 년이흐른서울의모 대학병원에서였다.
5년여 동안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어머니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의사가 치료했음에도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위중해져 집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라는 의사의 권유를 받는 순간 아버지는 주위 시선을 아랑곳 않고 대성통곡을 하셨다.
아마 아버지의 눈물 은평 생 함께하며 고생시킨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미 안 함이 함께 밀려와 흘리신 눈물이 아닐까 짐작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눈물은 비록 슬퍼 흘리신 눈물이겠지만 눈물에 맛이 있다면 그 맛은 그 어떤 기쁨의 눈물보다 달콤했을 것이라 감히 짐작해본다.
그 금슬 좋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금 영천호국원에서 함께, 나란히 잠들어계신다.
최근 드러나도 눈물을 가끔 흘린다. 전에 없던 일이다. 심신이 약해져서인지는몰라도나도모르게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 점점 여성호르몬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TV를 보다가 도 음악을 듣다가도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아마 열심히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보기 좋아, 형제간에 친구 간의 우의와 우정이 보기 좋아 흘리는 눈물이 아닌가 싶다. 그이면에는 내가가보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나 회한이 자리잡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눈물을 자주 보여서는 안 되는데도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수필) 한가위 차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