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아님 열번째
계절 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이것저것 방학 계획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준비다. 예전부터 역사를 너무 몰라서 좀 부끄럽기도 했고, 한능검은 타 자격증과 달리 유효기간이 없다고 해서 이번 기회에 따기 위해 계획을 짰다. 주말부터 시작해 당장은 책이 없어서 OT부터 들었다. (EBS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최태성 선생님의 유튜브 무료 강의를 선택했다) OT를 듣는데 계절학기와 달리 30분 넘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만큼 너무 흥미진진하고 두근거리는 수업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근현대사를 배울 때 개항기, 일제강점기, 현대를 거치며 선조들이 어떤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나 고군분투했는지 배워보자는 말이었다.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역사를 통해 배우고 실천하자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시대적 과제'라는 말에 꽂혔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주소는 어떨까.
이번 <뉴스아님>에서는 국민의힘 당대표가 된 이준석이 밀고 있는 '능력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능력주의라고 하면 솔직히 조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순간부터 말하기 능력, 수학 능력, 영어 듣기 능력 등등 '능력'을 '성적'으로 수치화해 숨 쉬듯이 평가 매겨지고 그에 따라 나 스스로를 정의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당연하게' 유지해나가야 하는 삶의 방식인 걸까?
ㅡ얼마 전 유튜브 채널 씨리얼에서 화상 입은 사람들의 인터뷰 영상을 봤다. 한 여성분이 화상을 입고 병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병원에 엄청나게 많은 화상 피해자들이 있더랬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왜 지금껏 안 보였던 거지?"
ㅡ또, 예전에 한국장애인재단 서포터즈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장애인을 보기 힘들다는 점에 신기해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캐나다 같은 장애인 복지 선도 국가에 가면 장애인이 거리에 자연스럽게 다니는 모습을 보고 낯설어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사례를 보면서 '광장으로 나온다'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화상을 입은 사람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일, 학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에 취업이나 입학을 쉽게 하지 못한다. 이 모든 일 아래에는 '사람들의 인식'이 있다. 다수가 갖고 있는 인식이 이들의 삶의 영역이 밖과 안 모두를 아우를지, 안에만 갇히게 될지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를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한 것이냐면, 능력주의가 시대의 분위기를 결정짓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능력주의는 "누구를 광장으로 나오게 할지, 누구를 방 안에만 갇히게 할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능력으로 사람을 가르고, 수치화되는 능력으로만 위아래를 결정짓는 행태가 지속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보이지 않는 계급이 형성될 것이다. 여태껏 모두가 행복을 누릴 권리를 똑같이 부여받기 위해서 신분제를 폐지하고, 다 함께 잘 살자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모두가 노력한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데, 또다시 능력으로 줄을 세워 행복을 나누자는 것인가. 능력주의가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 거라는 말은 마냥 과장된 주장이 아니다. 지금껏 누려온 자들이 경험하지 못했을 진짜 현실이자, 어떤 순간에서는 능력으로 인해 열등함을 느꼈을 모든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박탈감과 행복도의 진짜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능력주의-무한경쟁. 능력주의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바는 이것이다. 무한 경쟁 사회를 낳으리라는 것. 무한 경쟁에 놓인 사람들, 이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과연 시선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시대적 분위기는 개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한국 사회 안에서 줄 세우기용 능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과연 부여받을 수 있을까. 능력이 최우선시되는 사회 안에서?
이준석이 쓴 '공정한 경쟁'도, 웃기게도 이에 반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쓴 '공정하다는 착각'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나는 공정을 가장한 출발선부터 다를 능력주의가 계속 정계나 언론에서 언급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아마 일반 시민들은 능력이 우선시되는 사회로 가고 있구나 하고 암암리에 느낄 것이고, 이것이 곧 시대의 분위기이자 공기가 되어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 경쟁 굴레에 뛰어들어 앞만 보고 달릴지도 모른다.
젤 처음으로 돌아가, 한능검 강의 OT에서 나온 '시대적 과제'라는 말을 다시 꺼내 본다. 일반 시민이자 학문의 장인 대학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내가 느끼는 현세대의 중요한 시대적 과제는 여성과 남성 간의 갈등, 세대별 갈등 등, (디지털 신호도 아니고;) 이진법의 0과 1처럼 두 부류의 갈등 구조가 계속해서 형성되는 걸 막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중요한 시대적 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능력이라는 기준점을 만들고 사람들을 분류하려는 것이 과연 우리나라를 이끄는 사람이 자신을 선전하는 말로서 해야 될 말일지 한탄스럽다.
능력주의에 열광하는 사람들. 그에 반해 능력에 따른 노동이 아닌 코인,주식으로만 돈을 벌려는 사람들. 뭔가 모순적이고 기이하다.
가만히만 냅둬도 인간은 알아서 자신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사유하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위에서의 스스로에 대해 고민한다. '나'라는 사람과 나를 둘러싼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기회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또다시 능력주의를 외치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에 뿌리 깊게 자리한 경쟁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사람들을 정신 못 차리게 채찍질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잠시 정말로 이대로 가는 것이 맞는지, 정말로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책을 소비하며 꾸역꾸역 일말의 여유라도 가져보려고 발버둥 치는 게 맞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잠시가 아니라 진지하고 깊게. 적어도 다음 세대에는 핀란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며 TV 앞에서 여유를 갈구하는 학생들이 없기를 바란다.
#뉴스아님 #2021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