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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이와 지덕이 Mar 07. 2024

취중진담을 믿을 수 있을까

취중진담(醉中眞談)은 술에 취한 동안 털어놓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뜻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맨정신으로 말하기 어려운 진솔한 말을 술의 힘을 빌어 말할 때가 있다. 나는 이런 취중진담이 의문스럽다.


해마다 3월이 되어 신입생이 입학하면 대학교는 각 과별로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 내가 신입생으로 입학했던 1980년대 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재학 중인 선배들과 새내기 신입생들이 서로 대면하여 대학생활에 대한 팁과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관계를 쌓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즐거운 모임에도 좋아 보이지 않는 모습이 있었으니 소위 '신고식' 또는 '사발식'이라고 불리는 대학교 음주 문화였다.


나와 동갑내기 사촌동생은 같은 해에 같은 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느 날 사촌동생이 신입생환영회에 갔더니 재학 중인 선배들이 술을 한 사발 마시라고 주더라는 것이다. 술을 사발에 따른 다음에 한 번에 쭈욱 마시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술을 거의 못 마시는 사람에게도 여러 번에 나누어 들이켜 마시라는 것이었다. 나는 술을 거의 못 마시며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사촌동생의 이야기를 듣자 겁이 났다. 우리 학과도 이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우리 학과 신입생환영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것은 직장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종종 애로사항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장점도 있었으니 술에 취해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잘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대기업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우리 부서의 분위기는 수직적인 분위기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IT실(전산실)이라 도서관 같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일하며 자율적이고 능동적일 것 같지만 내부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부서장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부서장의 말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부서 직원들은 부서장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기도 하고 일부 중간관리자급 직원들은 부서장의 기쁨조가 되려고도 했다. 


대기업이라 직원들 숫자가 많아서인지 우리 부서의 직원수는 거의 200명 가까이 되었다. 직원수가 많다 보니 업무는 팀별로 나누어졌고, 직원들은 소속된 팀에서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되었다. 부서 회식, 팀 회식, 동기 모임 등 퇴근 후 회식 자리도 종종 있었다. 부서장의 말에 순종적이던 직원들은 팀 회식 등 부서장이 없는 술자리에서 술을 어느 정도 마시기 시작하면 부서장 및 일부 측근들의 언행에 대해 비판했다. 나는 직원들이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채 부서장에 대해 비판하는 말이 직원들의 진심이 담긴 말이라고 느껴졌다. 그들은 부서 분위기가 개선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것이다. 




상대방이 술에 취해서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 진담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내가 대리로 승진하고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고객인 A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생산지원팀에 근무하는 A직원으로부터의 업무 요청 전화였다.


"이대리님. MES(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 생산관리시스템)에 있는 데이터에 수정해야 할 내용이 있어요"


그는 나에게 MES시스템 화면을 보라고 하더니 자신의 요구대로 수정해 줄 것을 말했다. 나는 어젯밤에 회식을 했기 때문에 몸이 조금 피곤했지만 그에게 알겠다고 말했다. 

 

"그래. 알겠어. 그렇게 할게"


그 순간 전화기 속에서 갑자기 황당하다는 말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대리님. 왜 이러세요. 왜 갑자기 반말하세요?"

"어? 어제 회식 자리에서 형 동생 하자고 하지 않았어?"

"그건 회식 자리니까 그렇게 말한 거고 지금은 다르잖아요"


그가 나에게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다시 예전처럼 존댓말을 쓰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찝찝한 마음으로 A직원의 요청 내용을 우리 팀 직장 선배에게 말했다. 그리고 조금 전 전화에서 A직원이 내가 반말한 것에 대해 짜증을 냈다는 것도 말했다. 그랬더니 직장 선배는 고객이 술 취해서 한 말을 그대로 믿으면 어떡하냐 순진하게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라고 나에게 말했다. 


A직원과 통화하기 하루 전날 밤에 회식 자리가 있었다. 고객은 A직원을 포함하여 서너 명이었고, 우리 팀 직원도 나를 포함해서 서너 명이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 팀과 고객사 직원들은 술을 마시면서 화합을 다졌다.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부분은 원만히 조율하고 서로 윈윈(win-win)하는 관계가 되도록 말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술에 취한 A직원은 갑자기 우리 팀 직장 선배에게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나에게도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기 나이가 나보다 세 살 어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말했다. 내가 말을 놓아도 되겠냐고 물으니까 그는 그래도 된다고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재차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어차피 우리 팀은 고객사의 업무를 지원해야 하고 A직원과 업무상 서로 자주 마주칠 텐데 편하게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지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A직원은 갑의 위치에 있는 고객사 직원이었고 우리 팀은 그가 속한 생산지원팀의 요구사항들을 조율해 서비스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A직원이 나에게 한 말은 술김에 그냥 한 말 같았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나는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사람이 하는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술에 취한 사람이 나에 대해 조언을 하거나 타인에 대해 말하거나 기분이 좋은 듯 어떤 것에 대해 말할 때도 그의 말이 진담일까 의문스럽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으므로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한 말은 잘 기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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