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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Feb 15. 2024

물 가에 내놓은 아이야,

남겨지는 이에게 보내는 장

모세 이야기를 기억할는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때와 곳에서 기어코 엄마 배를 뒤집고 나와 강물에 바구니째 띄워졌던 갓난쟁이를. 물줄기의 끝이 어딘지, 아니, 그전에 이 강의 폭이 제가 태어난 세상의 몇 분의 몇쯤 되는지조차 까맣게 모른 채 아이는, 등 뒤가 내내 시렸으니 어떠했을까. 눈 떠 보니 히브리인 애굽 왕자였다. 그게 차가운 강물을 타고 흘러온 아이의 운명이었고, 앞으로 고 살아가야 할 정체성이었던 거.


너는 그 운명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처음으로 네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았을 때였지. 우리 둘 모두 아연해져서 한참 간 말이 없었다. . 너는 그런 외피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었구나. 길거리를 걷다 하필 내 머리 위로 물벼락이 쏟아진 것만 같았어. 어쩜 그럴 수가 있지. 어쩜 그걸 몰랐을 수가 있지. 하필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있을 수가 있지.


일사불란하게 지나쳐 가는 기억들이 있었다. 내가 너에게 용기를 주었던 일들. 내가 네 어깨를 단단히 붙들고 알아듣기 쉽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기도문을 읊어주던 일들. 따라 해 봐. 말이 익숙지 않았던 너는 단 세 문장도 따라 하질 못했다. 그러면 내 몫은 두 배가 되는 것이었지. 여섯 문장을 더 읊조려야 했어. 네 닫힌 귀가 벌렁이라고, 그렇게 훔쳐 듣기라도 하라고.


살아야지. 나는 살아 너에게
네가 살고 싶은 세상이 되어줘야지.
- 위수, 교토


그 노랫말이 내겐 전부였는데. 지금 와서는, 어리석었네. 네가 어디서 흘러왔는지도 몰랐으면서. 베놈 심비오트처럼 네 몸에 딱 들러붙어선-너의 감각적, 감정적 기능을 고장내고 마침내 네 행세를 하는 그 진득한 운명에 대해 조금도 들어본 적 없었으면서. 너를 도울 수 있다고 자신했다니. 네가 날붙이로 팔목을 긋지 않아도 될, 호흡이 멈추는 공포에 심장을 쥐어뜯지 않아도 될, 욕심껏  갈구해도 되고 그래도 미움받지 않을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했다니.


불운하게도 너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 것 같아. 용케 전복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너는, 이제 평생토록 등을 붙이고 함께  억울한 쓸쓸을 견뎌 줄 나만 있으면 다 괜찮다고 여기는 것 같아. 종종 네가 당연하게 미래와 성장, '우리' 따위의 화두를 던지면-나는 너의 걸음 속도에 맞추어 느릿느릿 걷다가도 일순 돌부리에 콕 찧은 것처럼 휘청였다. 응원도 단념도 택하지 못해서 고개만 끄덕이는 순간이 많아졌다. 무엇을 긍정하는지도 모르고. 네가 몇 번째 같은 말을 하고 있나, 세기만 했다.


너는 똑같은 말을 처음 하는 것처럼 말하는 데 능하고, 나는 똑같은 말을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하는 데 능하지. 너는 네 불안의 이유를 자주 확인받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 나는 네가 한 바가지 쏟아놓은 심상을 같이 들여다 봐주면 그만이지. 결국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겠니. 가만 끄덕이는 수밖에.


하지만 물 가에 내놓은 아이야, 그것은 네가 날마다 나의 품으로 돌아올 때의 이야기. 그만 놀고 밥 먹으러 와, 곧 해 지고 어두워지니까 돌아와, 오늘은 날도 추운데 감기 걸리지 않게 들어와… 너는 굽은 등을 보인 채 그리 불러줄 집을 기다리겠지만, 이제 나는 그곳에 없다. 몇 날 며칠이고 냇물에 젖어갈지 몰라. 입술이 시퍼레져서도 흠칫흠칫 뒤만 돌아볼지 몰라.


비가 오고 물이 불어나면 생각보다 물살이 빠를 거야. 세모네모 각지고 모난 돌들이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이리저리 뒹굴고, 부딪히며 빈틈없이 굴러 내려오다가… 영영 네 발목을 놓아주지 않을지 몰라. 네가 싫어하는 진흙 더미의 녹진한 질감, 억세게 잘려나간 수초 단면에 쓸려 나는 생채기를 피할 수 없을 거야. 하고 싶은 말만 반복해서 할 수 없을 거야. 듣고 싶은 말만, 아프지 않은 말만 요청할 수 없을 거야. 폭우가 심한 날 우산 정도 씌워주러 머무는 사람 또한, 감히 집이 되어줄 용기를 내진 않을 거야.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요. ❞


혹여나 그런 볼멘소리는 말아. 오래전 우리가 손수 지었던 집을 너는 안다. 꽤나 단단한 것을 지었잖아. 너는 다만 그 집을 달팽이처럼 짊어지고 다닐 만큼, 딱 그만큼만 강해주길. 수시로 숨어들어도 좋으니, 그 껍데기를 온전한 네 영혼의 소유로 삼아주길.


너는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보내지는 거야. 미끄러져 나아갈 수 있게 네 뒤에서 성실히 기도문을 외울게. 너는 이제 손과 마음을 모으고 입술을 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 나는 우리가 같은 운율로 기도하리라고 확신한다. 각자 있는 곳에서, 서로를 더듬어 생각하며, 언제나 듣고 있기 위해 침묵하는 고요한 신께.


거기서 너는 내가 만들어주지 못한 세상을 살아줬으면. 존엄성을 찢어 먹으며 하루를 연명하지 말고, 쫓겨나지도 달아나지도 말고, 서투르게 사랑을 받아먹으며. 멋모르고 바삐 두리번대다가, 침 튀기듯 일부의 사랑을 난사했으면. 그 사소한 이물감에 불쾌함을 드러내는  있을지라도, 누군가는 그 우연으로 반드시 구원받았으면.


그런 세상까지 바라도 괜찮은 걸까. 안된대도 나는 너를 위해 그렇게까지 바라주고 싶다. 그러니 너는 이런 나를 위해 그 집을 지켜내 주어. 꼭 그 무늬같이 빙글빙글 돌고 돌아 끝끝내 그 집 안에서 웅크린 채로 발견되어 주어. 모든 운명이 뒤섞여 어지러이 굴러가는 세상 끝, 그것만이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그리고 진정 유익한 기쁨.


그럼 이만, 줄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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