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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Feb 01. 2024

내가 너와 친해졌을 무렵에,

좋아하는 친구에게 보내는 장

무엇이든 마모되기 쉬운, 세찬 겨울이다.

친구야. 고백하건대, 내가 투명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나는 네 덕분에 알았다.


우리가 어쩌다 친해졌더라. 최근까지도 뇌를 까뒤집고 탈탈 털어 토론을 했는데, 여전히 알쏭달쏭한 주제였다. 생각해 보면 너와 나는 접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채로 만났으니까, 분명 특별한 계기가 있을 성싶은데. 얼마 전에는 치과에 갔다가 모서리가 깨진 내 어금니 하나를 사진으로 보았다. 동그랗게 패인 자리를 레진으로 때웠어. 딱 그 모양처럼, 너와의 첫 만남은 아무래도 기억 덩어리 외곽에서 깎여 나가고 없는 듯했다. 듣고 싶다고 조르는 너를 앞에 두고 못내 미안해져서, 애꿎은 얼음을 까득 까득 씹었어. 치과에서 그러지 말라고 한 지 이틀을 채 못 넘기고. 습관이란 게 참 무섭지.


내가 너와 친해졌을 무렵에, 우리는 명백하게도 불완전한 존재들이었다. 지금이라고 완전하겠냐만은, 그때의 우리는 떠올리기만 해도 수치스러울 정도의 미숙함을 갖추고 있었어. 기억하니. 아이돌 가수 누구를 좋아한다든지, 이상형이 어떻다든지, 요즘 그 영화 재밌다더라, 옆 동네에 새로 생긴 카페가 예쁘다더라, 하는 가볍고 풋풋한 이야기 따위로 배 채우지 않았던 우리를. 세상 모든 십자가를 짊어진 처럼 암울하고 버거웠던 우리의 그 시절을.


인생은 고독이고 불안이고 진창이라는 사실을 우리만이 제대로 겪고 있다고 착각하기 바빴고, 허무주의 철학자들처럼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 끈덕지게 파고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관계가 정밀하게 짜인 세트가 아닐까 의심하곤 했지. 우리에게 갖가지 자유의지를 허락하지만, 결국 가짜인 데다 이미 정해진 틀 안으유도하고 마는 커다란 세계.


우리가 발버둥 친다고 무엇을 해낼 수 있지. 무엇이 달라질 수 있지. 우리의 선택이 우리 자신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혹은 떠미는 상황들이 추후에는 아무것도 책임져주지 않을 텐데. 뒤집어진 양처럼 무력하고 위태롭게 의문들을 쌓아가던 나날들. 어쩌면 나는 너와 함께여서 스스로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너는 내 모든 비관을 우습다 여기지 않았잖아.


❝ 너는 생각도 깊고, 어른스럽고, 담담하고, 따뜻해. 그래서 좋아. ❞


너는 8년이 넘게 친구로 지내오면서도 그런 칭찬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답지 않게 쑥스러워 말을 잃고 어깨를 비틀어버렸다. 그럼 너는 이런 내가 가끔씩은 어린아이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지. 나를 어른으로도, 아이로도 보는 네가 나는 되려 신기했어. 나는 내가 어른이자 아이라는 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예전 나는 너를 참 많이 의지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너와 내가 그저 같은 궤도를 돌며 공존하는 각각의 행성이라고 생각해 왔던 듯해. 내가 너에게 느꼈던 깊은 감정은 같은 모양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을 향한 동질감일 뿐이었다고.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스스로를 어른이라 믿어왔던 오해와 비슷했다.


❝ 너는 내가 왜 좋아?❞


이런 걸 묻다니 부끄러워, 하면서도 너는 물었지. 그리고 나는 이제 그것이 어른의 덕목임을 안다. 내 이야기를 줄줄 뱉어내는 것보단 남의 말을 오래도록 잘 들어주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했어. 천진난만하게 낙관하지 않고 삶의 비관을 직시할 줄 아는 게 어른이라고 생각했어. 사랑에 목말라하고, 불면과 울음을 드러내는 것은 어른답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친구야, 흰 얼굴을 불그스름 물들이며 아이같이 묻는 너는 꽤나 어른이야.


❝ 나는 네가 투명해서 좋아. ❞


네가 그런 것도 물을 줄 아는 사람이어서, 속절없이 비관할지라도 함부로 낙관하는 사람이어서, 더 나은 모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그리 되기 위해 필요한 긴장과 어색함도 숨기지 않는 사람이어서, 병이 날 때까지 숨을 참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토록 투명하게 제 자신을 내비치는 사람이어서.


그런 말 들으니 좋다고 웃는 너는 나를 안심케 해. 비록 우리 궁금해하던 것의 답은 달지 못했지만, 또 그다음 8년 뒤의 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아득하지만. 지금은 당장의 겨울을 겨울답게 보내는 방법을 두고 토론해 보자. 겨울 내내 꼼짝없이 동면할 게 아니라면 맞닥뜨리는 것들을 투명하게 투과해 낼 줄 알아야겠다, 문득 그런 결심이 생겼어.


우리는 새해 계획을 함께 세우기 시작했는데, 심사숙고해서 5개 정도 적으려는 나와 일단 생각나는 대로 30개를 써 내려가는 너는 참으로 달랐다. 5개도 다 못 지키는 사람이 되기보다, 30개 중 5개라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쉽고 보람차더라며. 어디서 주워들은 사례가 아니라 네 경험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서른 개의 계획은 생각보다 술술 쓰였고, 우리는 단 한 개도 겹치지 않는 서로의 다짐들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항목들을 각자의 것에 또 추가하고, 그랬지. 우리 각자의 올해는 너무나도 다르고, 그래서 서로의 생경함을 또 받아들이고, 그러니 마침내 닮아있을 거야. 익숙해진다는 그런 게 아닐까. 우리가 어쩌다 새해 계획을 세우게 되었지, 나중에는 그런 것쯤 기억 못 해도 좋을 것 같다. 만약 그때도 네가 나에게 얼마나 막역한 친구인지 궁금하다면 다시 물어봐주어. 진실되게 대답해  테니.


그럼 이만, 줄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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