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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Jan 25. 2024

어느 세월에 당신 같은 연인을,

지나고도 아끼는 인연에게 보내는 장

안녕. 또 당신 꿈을 꾸었습니다.


태생이 무디고 현생은 바쁜지라, 그리 구슬프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당신이 즐겨 읽던 책을 펼치고, 당신의 눈길이 닿았던 문장들을 입술에 붙이며, 당신이 즐겨 듣던 노래를 계절에 맞게 골라 들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향이 파다한 가게에서 오래도록 쇼핑을 하고, 언젠가 함께 가자고 했던 지역을 닮은 거리를 친구와 깔깔 웃으며 누볐습니다. 당신은 어떤 장소에, 어느 순간에도 없었습니다. 그 모든 빈자리를 챙겨 꿈속에 수를 놓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지요.


❝ 잘 지내고 있지(お元気ですか)? ❞


당신이 건넨 그 말은 지극히 평범한 서두이자 매년 겨울 찾게 되는 영화의 명대사였습니다.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당신은 아마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을 테지만, 그 영화는 당신을 닮았습니다. 첫사랑과 똑 닮은 얼굴의 여자를 사랑하던 그 사람을. 묻고 싶어요. 당신이 소중히 아꼈던 것은 비단 그때의 나였습니까. 지금도 나인 나는요. 더 이상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닙니까.


당신 품에 조그맣게 안겨 있던 나를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쩔 수 없음'에서 보호받을 수 있을 것만 같던 때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당신 곁에 오래도록 있을 수 있을 듯이 발그레했고 무모했습니다. 가끔 나는 그때의 내가, 생김새만 같은 전혀 다른 인물처럼 여겨집니다. 히로코와 이츠키처럼. 그들과 같이 편지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이미 나에게는 수취인불명의 쪽지들이 수북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이름을 구하지 않을, 읽음을 요구하지 않을 쪽지들이니 이대로 폐기되는 편이 나을까요. 부끄러운 말이지만-실로 오랜만에 집청소를 하면서 물건의 절반을 내다 버렸는데, 그 쪽지들은 여전히 책장 한 구석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아있습니다. 놓아주기 어려우니 알아서 날아가면 좋을 텐데요. 혹시 몰라 창문은 열어 두었습니다.


아무쪼록,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잘 지내고 있나요. 어떤 잘 지냄을 바라고 내게 안부를 물어옵니까. 실은요, 나는 이제 그때만큼 반짝이지 않습니다. 당신과 밤새워 이야기 수프를 끓일 때처럼 펄펄 기운이 나지도 않고, 스스로 대단히 특별한 사람이라 느껴지지도 않고, 서로 다른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궁금해하는 취미로 노트 한 권을 다 채울 수 있던 기적도 없어졌습니다. 그게 막 서럽지는 않습니다. 다만 부정할 수 없이 당신은 꿈속의 형상만으로 나를 떨리게 하는 과거였습니다.


추억한다 적고 후회한다 읽었습니다. 벅벅 지우자 남는 글자는 두 자, '추회(追懷)'였습니다. 당신은 추회입니다. 당신은 지나갔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리운 무엇입니다.

 

이것이 내가 고심해 낸 나의 안부입니다. 여전히 송부할 예정 없는 쪽지의 한 귀퉁이입니다. 답신을 원치 않으니 염려 마세요. 혹 내가 보고 싶다고 적었다면 용서해 주세요. 그것은 진실로 당신을 봐야겠음이 아니라, 입속에 차오르면 한 번씩 꺼내주어야 하는 생물학적 감정에 가깝습니다.


이 과정을 겪어내고 나는 끝내 무엇이 될까요. 당신 아닌 누구 앞에 다다르게 될까요. 그러는 동안 당신은 전처럼 책을 아껴 읽고, 노래 가사를 외워 흥얼거리며, 향 좋고 풍경 예쁜 곳으로 마음껏 여행을 다녔으면 합니다. 여전히 누군가를 애정하고, 애정 어린 감사를 돌려받으며 충분히 웃었으면 합니다. 당신이 지칠 때 머리 누일 곳이 되어주고, 당신이 불안할 때 기약을 건네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기를. 그리고 부디, 그 정을 포기치 말고 끝까지 지속해 주기를. 세상이 당신의 시간을 한 움큼씩 앗아가는 동안에도 계속.


 말하는 게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어.


꿈속에서 우리는 설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나란히도 아니고, 앞뒤로 서서, 천천히. 넓은 보폭으로 걷는 당신과의 사이가 점점 벌어져서, 나는 혼잣말을 참 크게도 했습니다. 첫 만남에 "사랑 없이 결혼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는 내 대답에 신기해하는 엉뚱함,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용쓰고 있다면서 얼마 안 가 음료를 엎질러 버리는 서투름이 꼭 당신 같았습니다.


나를 바래다주고 빗속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오래 배웅하지 않고 돌아선 것은, 당신에 대한 사무침이기도, 그 사람을 향한 미안함이기도 했습니다.


하산할 즈음이면 우리의 발자국은 이미 다 감추어지고 없겠지요. 이번에는 내가 앞서 새 눈밭을 걸어 내려올 테고, 등 뒤에 있는 당신에 대해서는 건듯 잊어버릴 것입니다. 어느 세월에 당신 같은 연인을 만나지, 노랫말처럼 읊조리다-만나야지, 어느 세월에든 당신 같은 연인을 만나야지, 할 것입니다. 그때는 잘 지내고 있느냐는 말도, 메아리도 없는 겁니다. 허무맹랑한 꿈속의 밀회 같은 건 없는 겁니다. 구구절절 적어 내려가다가도 어쩔 수 없이 끝을 맺는 편지처럼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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