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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Jan 18. 2024

내가 엄마를 연민하는 이유는,

엄마에게 보내는 장

 엄마, 나는 엄마가 나중에 죽으면 그게 언제든 진심으로 기뻐해줄 거야. 고생스럽기만 했던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비로소 온전히 평안해질 테니까. 


눈이 붉지 않은 사람. 오늘따라 말수가 적다든지, 칼날로 도마를 내리치는 횟수가 불필요하게 많다든지 하는 지표로 나는 당신의 감정을 읽었습니다. 좀처럼 언어화되지 않는 감정들이 입 안에 돌기처럼 우후죽순 돋아나면, 무어라 말로 하려다가는 자칫 고통스럽게 씹어버릴지 몰랐습니다. 그런 괴로움 속에 당신을 홀로 내버려 둔 적이 많았음을 시인합니다. 곁을 붙이고 있기엔 두렵고 어린 날들이었습니다.


넌 그러지 마. 엄마처럼 고생스럽게 살지 마. ❞


말하는 눈이 붉은 것은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녹색 반찬들이 가득 널브러진 식탁 위에 화병처럼 무심히 놓여 있던 대화였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무심코 붉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요. 그간 함께 밥을 먹던 시간이 참 많았는데. 여태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정말이지 무책임하게 여겨졌습니다.


예로부터 무책임은 언제나 당신의 낙인이었지 않습니까. 당신은 가슴팍을 자주 여몄고,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불치의 고통을 숨기 꽝꽝 두드렸는데, 그게 박는 소리가 나서 나는 자주 무서웠습니다. 이제 나의 가슴이 뜨끔합니다.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몸이 앞으로 구부러지고, 어디로든 뛰어들면 단숨에 가라앉을 듯 무겁습니다. 훗날 당신이 하늘로 떠오를 때쯤이면 나는 심해 밑바닥을 겨우내 만져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겨울바다를 좋아합니까. 첨예한 칼바람에 발목을 연신 베이면서도 맨발로 연안을 걷곤 했습니다. 파도 거품이 발톱을 옅게 적시는 곳에 우뚝 서서, 바다의 가장 깊은 지점을, 검푸르게 말려 들어가는 겨울을 집요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이 무언가 기억해 낼까 겁이 났습니다. 저 아래 까마득한 바닥에 침전해 있는, 언젠가 당신이 오래 머물렀던 기억의 테두리를 낚아 올릴까 봐. 실은, 개중 내가 딸려오면 어쩌지, 당신의 발목을 심해에 묶어둔 것이 나라면 어쩌지, 하는 근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추우니 빨리 들어가자고 괜한 응석을 부리지도 못했습니다. 어린 나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당신을 당신으로 둘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솔직해지지 않으면 당신을 엄마로 대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무렵, 눈 붉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던 당신. 이 무렵의 당신은 종종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무심코 떠올려내곤 상에 올렸습니다. 물도 없는 화병 속 목을 간신히 가누고 시들어가던 꽃들일랑 버리고,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반찬 삼아 식사를 했습니다.


❝ 너는 왜 이런 반찬 좋아한다고 말을 안 했니. ❞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혹 대답이 돌아올까 봐 긴장하는 듯한 어투였습니다. 나는 부지런히 젓가락만 놀렸습니다. 좋아하는 반찬을 올려 밥이나 움푹 움푹 떠먹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앞섶의 낙인을 들추어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거기 그런 것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잊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겨울바다를 쓸쓸히 건너다보지 않았으면, 다 닳은 양 팔의 지느러미를 문지르며-아, 언젠가 나도 바다를 헤엄치던 시절이 있었지, 회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파도가 있는 힘껏 달려와도 결코 미치지 못할 뭍에 서 있는 나를 뒤에 두고.


❝ 너는 왜 그때 힘들다고 말을 안 했니. ❞


❝ 너는 왜 그런 이야기를 여태 안 하다 이제야 하니. ❞


어느새 당신은 그런 류의 주제에 익숙해지고 있었습니다. 말을 하고 살아야 한다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둘 모두의 가슴속 몽우리였습니다. 당신은 말 없는 나를 대신해 당신의 사연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내 가슴속 깊은 곳, 짙고 검푸른 바닥을 향해 별똥별처럼 곤두박질치는, 떨어지고, 떨어지면서 나의 내벽을 서투르게 긁어내리는 이야기들.


당신은 늘 자신을 깎아 먹으며 살아왔다고. 그게 아파서 때로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아주 못 살게 굴었다고. 그건 당신의 잘못이기도 했고, 당신의 부모님 잘못이기도 했고, 시대 때문이기도 했고, 돈 때문이기도 했고, 건강 때문이기도 했고 그랬다고. 강박처럼 누구의 탓을 찾아다녔다고. 잘한 거 하나 없지만 당신도 힘들었다고, 정말 많이 힘들었다고.


는 당신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여태 안 하고 지금 하느냐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 불쌍하지? ❞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붉었던 사람들 마냥 자연스럽게 시선이 물들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었던가요. 여전히 당신이 던진 물음과 나의 대답이 엇갈리길 바라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미안합니다, 나는 당신이 불쌍하고 가엾습니다. 연민합니다. 당신이 차라리 발목을 벗고 껍데기째 훌훌 날아가버리기를 감히 소원할만치, 당신을.


그러나 가 닿고 싶은 말은 여기 있으니, 이 말을 먼저 읽어주세요. 


❝ 엄마. 내가 엄마를 연민하는 이유는, 엄마 인생이 기구해서가 아니야. 내가 엄마를 사랑해서지. ❞


당신의 삶은 불쌍하고 가엾지만 결코 미련하고 기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연민하고 안쓰러워하지만 그것은 내가 당신을 어루만져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도 더 보탤 수 없지만, 원하는 어떤 반듯한 대답도 진솔한 이야기도 내어놓을 수 없지만, 당신의 주름진 이마와 퍼석한 머리칼을 넘실넘실 만져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탓을 해야 한다면, 딸이 되기 위해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나의 마음에게로 돌려주세요.


그럼 이만, 줄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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