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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Jan 11. 2024

연서(戀書)

작정하는 장

묽고 탁한 물이 철철 흘러나옵니다.

이천 년 세월 굵어져 온 거대나무의 몸뚱이에서 떨어져 발치에 길게 누운 나뭇가지 끝에서.

피처럼 쏟아지는 물,

어쩌면 물처럼 쏟아지는 피.

짙은 고동색의 피부가 차츰 썩어 검어집니다, 어쩌면 창백해집니다. 몸 곳곳에서 손가락 발가락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 잔가지들을 움직여봅니다. 조금의 가냘픈 떨림도 없습니다. 미약하게나마 요동하는 심장을 눌러 힘을 쥐어짜보아도, 질퍽해져 가는 흙바닥 위에 늘어진 채 속절없이 부식되어 가는 그것들.


연민입니까, 자책입니까. 부러진 몸과 찢어진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내어줄 수 없었습니다.


나무에게로 돌아갑니다. 어깻죽지 자리에 시커멓게 남은 구멍을 가까스로 올려다봅니다. 나무에게로 돌아갑니다. 깡마른 껍데기가 되어버리기 전에, 단비처럼 줄줄 새어 나오는 물줄기를 받아 마십니다. 다급한 갈증, 그리고 거센 수압에 못 이겨 침식되는 이목구비. 반나절이 지나면 나는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껏 나무에게로 돌아갑니다. 단내음이 진동하는 꿈 속에서 깨어나길 원합니다. 손발 끝의 감각으로 전율하길 소망합니다. 그러니 겨우내 살아남아주세요. 끈적이는 얼굴을 문지르며, 한데 뒤엉켜 발버둥 치다가, 남의 귀 한쪽을 붙이고 팔다리 맞바꾼 채로 서로를 발견합니다. 자, 이제 누가 누구죠. 참으로 별난 일이라 앞다투어 웃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하늘을 새 떼처럼 뒤덮은 널따란 나뭇잎들이 웃는 소리를 가르느라 우수수, 흩날립니다.


사랑하는 것들에게. 나는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흘려보내기 위해 받아 마시는 사랑, 살리기 위해 살아남는 사랑. 나를 넘어서는 경계에서 목을 높게 빼고 외쳤습니다. 나의 낭비를 받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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