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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Feb 08. 2024

우린 어떤 방식으로든,

자주 붕괴되는 이에게 보내는 장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던 너에게.


너를 물질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걸핏하면 얄팍한 유리잔처럼 금이 가고 깨졌다가, 또 금세 어데서 옮아 온 열로 이어 붙는 변덕스럽고 엉성한 물질. 그러나 무어라 이름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나는 덩달아 혼란스러웠다. 전화벨이 울리면 무서웠고, 울리지 않으면 잠을 설쳤다. 이다지도 불균형한 삶이라니. 나는 말이지, 괜찮지 않았단다.


가 진정으로 괜찮다면 내가 안 괜찮을 리 없잖니. 나는 줄곧 너에게 연동되어 있었으니까. 괜찮아, 괜찮지 않을까,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어미만 바뀌는 주문이 네 자신조차 속이는 마당에 내가 밀려나지 않고 배길 수 있었나. 너는 립된 섬인 주제에 나더러 밀려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도 하필 여기 있을 뿐이야. 구태여 들이닥치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그냥 이렇게. 네 주위에 잠잠히 고여 있을 뿐이야. 울분을 삭이며 물결이나 고르고 있으면 얼마 안 가 네가 다시 부를 것을 알았다. 전화벨 소리. 달칵. 여보세요. 또 무슨 일이야.


'사랑' 그 비슷한 것은 교묘히 피해 가는 대화였지. 그 단순한 단어를 외우지 못하면 어떤 성숙한 문장도 더 만들어내지 못할 텐데. 이상하게도 너는 그 단어 앞에서만 바보 천치되었다. 내가 너를 위해 'ㅅ'을 삼백 번째 쓰고 있던 어느 한날, 너는 종이를 찢었고 그때 나는 한 문장을 지었다.


우린 어떤 방식으로든, 상생하기엔 글렀구나. 


너는 네 잦은 붕괴만 견디기에도 벅찬 사람이었던 거야. 상생을 요구할 수 없다면 나는 네게 무엇이 되어줄까. 매사 너와 함께 마음 졸이며 견딜 수도, 매번 절벽 끝에서 떨어지는 너를 끌어올릴 힘도 없는 내가.


❝ 나는 너에게 뭐야?❞


가끔은 뾰족하게 묻고 싶었어. 조각 난 종잇장들이 둥둥 떠서 표류하는 나의 수면을 봐. 부서진 네 잔해들이 내 안에 너무도 많아서 이제는 삼켜지지가 않는다. 가라앉지도 않고 나를 짓누르는 속 빈 열대과일들, 햇빛에 누렇게 얼룩진 야자수 이파리, 망가진 뗏목, 다 쓴 기름통 같은 것들. 봐, 나는 더 이상 바다가 아니야.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버렸어. 여기, 너를 둘러싼 채로.


그러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잔모래를 부스럭대며 다가온다. 우리 함께 하던 놀이를 계속하자. 삼백일 번째 'ㅅ'을 써주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내게 종이를 들이민다. 추레한 손가락에 매달린 너의 창백한 부탁을 나는 습관처럼 부여잡고. 두 획 뿐인 글자가 새삼스레 어려워서, 무어라도 쓰는 척 종이 너머로 비치는 마음을 보고 있었다. 파문 하나 일지 않는, 정지된 수면. 하지만 움직여야만, 움직여 써야만 다시금 일렁일 수 있겠지. 이대로 굳어지고 썩어지면 너는 어떻게 되나. 이미 외딴섬인 너는, 바다를 잃고 어떻게 되나.


여전히 그딴 것이 걱정인 나를 봐서라도, 자꾸 투기하고 튕겨내는 삶은 이제 그만두면 안 되겠어. 어떻게든 삼백이 번째의 시옷과 삼백이 번째 아와, 삼백 이 번째 리을과 또 하나의 아와 삼백이 번째 이응을 써볼 테니. 너도 꾸역꾸역 따라 읽어줄래. 정말이지 단 한 번이면 된다. 너는 그 한 번으로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야. 애원하는 심정까지 다다른 것은 어쩌면 잘된 일. 누군가를 위해 바랄 수 있는 마음의 면적이 남아있음은.


당분간은 섣부르지 않기로 하자. 내가 너의 유합을 빌어주는 동안에-너는 무리 말고 바르게 누워 덧난 마음 구석구석을 여실히 느끼길, 더없이 못나고 남루해지길, 스스로 어떤 최선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되길, 그게 참으로 모질고 참담해서 팔다리를 다 놓아버리고 나면, 그래서 어찌어찌 눈알만 좌우로 굴릴 수 있게 되면, 그제야 나의 마지막 편지를 곰곰이 들여다보길, 읽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어서 더는 피할 수 없게 되길, 벽에 머리를 박고 투신하기 일쑤였던 나의 모든 사랑들을. 


이다음에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 멀리서부터 찰랑이는 인사를 희망한다. 서로 맞닿고 침범해도 해 입지 않을 그날에. 부재중이지만 이 모든 말이 진심이다.


그럼 이만, 줄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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