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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Feb 22. 2024

강아지처럼 쏘다니죠 신이 나서,

흰 눈 사이 겨울에게 보내는 장

일종의 작별일 겁니다. 나는 가요. 당신이 없는 곳으로.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로. 백야의 크리스마스를 위해 떠납니다. 지난달 꺼내두곤 아직 치우지 않은 미니트리에 털 달린 옷들을 다 덮어 두었습니다. 너무 많이 춥지 마세요. 겨울이란 이름을 달고도, 당신은 정이 많은 계절이라는 것을 내가 압니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로 오래가려니 아쉬워지는 마음을 감출 길 없네요. 어제는 그런 나를 붙잡을 것처럼 흰 눈이 펑펑 내렸고 참을 수 없이 추웠습니다. 추위를 아주 많이 타던 청소년일 적에는 갈비뼈를 들추고 살점을 뜯어먹는 칼바람에 울음을 터뜨리며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별 게 다 서럽던 시절이었죠.


아침 8시부터 슬슬 해가 지는 오후 5시 무렵까지 꼼짝없이 학교에 앉아있다, 막히는 퇴근길을 뚫고 학원으로 향하면 캄캄한 밤 11시까지 꼬박 피아노를 치고서야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김밥으로 채워 넣은 주린 뱃속에, 피가 나고 멍이 들어 스치기만 해도 저릿한 손끝에, 냉정한 바람이 들 때마다 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춥지만 않았어도 견딜만했을 텐데, 어리숙한 원망에 매달리던 나를 당신은 기억합니까.


그러나 당신은 곁에 있어줄 줄 아는 계절이지요. 조금 더 어른이 된 지금은 압니다. 내 속이 텅 비어 쓸쓸할 때, 나 대신 펄펄 끓어주는 이보다 나와 같은 온도로 곁을 지켜주는 이로부터 더 진한 위로가 온다는 것을요. 당신은 속마음을 깊이 봉인해 두고 무뚝뚝하게만 구는 답답한 계절도 아니고, 받기 버거울 정도의 애정을 제 열정 따라 쏟아놓는 이기적인 계절도 아니었습니다. 그토록 세심한 위로, 누구에게 해주기 참 어렵던데. 그 까다로운 일을 당신은 내가 자라는 동안 꾸준히 해주었다 싶어 새삼 고마웠어요.


그것은 당신이 매년 선물하는 평범함. 그리고 자주는 아니지만 당신은 특별한 선물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눈 예보는 빗나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풀이 죽어 실내에서 종일을 보내다 나오면, 어느샌가 벽지 무늬처럼 눈송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떨어지고 있고요.


그럼 나는 강아지처럼 쏘다니죠. 신이 나서, 무겁게 기워 입었던 중력을 얼마간 벗어내고 하늘을 향해 달음질칠 듯이 위로 점프합니다. 높이높이, 저어-위로요.


흰 바탕에 검정 글자만, 흰 얼굴에 검은 머리만 주구장창 들여다보고 있으면 피부는 10년이 늙고 뇌가 멍청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우습죠, 일과 공부를 할수록 맹해지는 사람이라니. 흑백처리된 일상을 한 장씩 인화해 내듯 정적인 몸짓으로, 얄팍한 정신으로 살아내다 보면 느닷없이 기쁠 일 같은 것은 꿈꾸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눈이 오는 날은 얼마나 특별한가요. 지구를 건지러 펼친 촘촘한 그물처럼 펄럭이며 넓어지는 눈의 너울. 가끔은 인적이 하나도 없는 공원에 우두커니 서서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의 한 소절을 흘려보냈습니다.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 이문세, 옛사랑


한 번만 더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올라가는 눈송이들을요. 아마도 투명 그물이었을까요. 작은 송이송이의 흰 영혼들을 거두러 내려온. 저 수많은 영혼들을 다 어디로 데려갑니까. 하늘 천국에 흩뿌려져 별이 됩니까, 바다 천국에 놓아져 물고기가 됩니까. 멍하니 올려다만 보다가, 나도 함께 딸려 올라갈 수도 있나요. 나는 이제 곧 떠나는데요. 더운 햇빛에 그을릴 살갗만 랑 지니서. 그렇게도 나를 욕심내지는 않겠죠.


생각해 보니 당신을 떠나는 것은 태반을 떠나는 것과 다름이 없네요. 내가 딱 이맘때쯤 태어났으니까요. 당신이 아직 혹독한 성미를 부리는 세상에 기를 쓰고 태어나 정이 들자 기어코 익숙한 품을 헤치고 나옵니다. 탯줄을 끊어먹고 계절을 거슬러 갑니다. 당신의 어떠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것은 태반의 아이가 막을 수 없는 섭리로 태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 생명이 태어나는 것만큼 생명이 자라고 독립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인데, 어쩐지 그 사실만은 잘 잊히는 것 같아요.


아기가 자라지 않고 뱃속에 머무르기만 할 수 없듯이, 영혼이 지상에만 영영 붙박여있을 수 없듯이, 흑백만 보고 살 수 없는 나는 남은 생을 칠할 여분의 빛깔을 찾아서 갈 터여요. 얼마나 멀리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궤도의 끝에 혹여나 당신의 시작점이 맞닿아 있다면-거기서 나를 기다려주세요. 모쪼록 한결같이. 환대가 환대인 줄도 모르게. 때마침 왔냐는 듯 눈을 내려주세요. 조금 기쁠지도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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