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영영 피지 못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사죄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런 나의 마음을 영영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남을 위해 고통을 허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굴 찌르지 못해 스스로 해 입는 가녀리고 아둔한 마음을 닮아본 적 있습니까. 한 귀퉁이라도 먹어치우지 못할 저주스러운 말마디들을 글로 배설하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이었습니다. 정리하려던 것일까요, 기록하려던 것일까요. 숨을 내뱉으려던 것일까요, 참으려던 것일까요. 아무렴 박제된 것은 과히 미련스러운 미련이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당신이 귀국한 날, 손을 맞잡고 함께 만나러 갔던 친구는 문득 물었습니다.
❝ 마음은 괜찮아? ❞
그 예전 살이 떨리도록 괜찮지 않았던 나에게 퍽 인색했던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나에게, 왜 그리도 냉정했을까요. 참아내지 않으면 처절히 패배해 버릴 것만 같은 강박이 내 목을 조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에게? 이기려던 대상이 무엇인지도 확실치 않았습니다. 그저 누구와 싸우듯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로 매일의 하루들을 퍼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신의 사나운 말마디들을 묻고, 또 묻다, 너무 깊이 파서 내 몸통까지 반쯤 묻히는 줄도 모르고. 어깨가 저려서 더 이상 다른 누구와도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는.
그럼에도 당신은 꽃 필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욕심껏 만개할 사람이었습니다. 저밖에 몰라서, 제가 제법 탐스러운 꽃인 줄은 알아서,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자존심을 부리다가도 결국 무엇이든 틔워내고야 말 것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이 무서웠습니다. 내가 지저분하고 무성한 풀밭 틈새에서 스스로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낑낑대는 동안, 이토록 하찮은 나를 구태여 짓밟고 깎아내리며 당신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꽃이 되리란 사실이.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이. 그다음에는 그 누구도, 당신이 자란 곳과 당신 발아래 살던 보잘것없는 화초들의 빛깔을궁금해하지 않으리란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곱씹고 곱씹다 마침내 너무 질겨져 삼켜내지 못하게 된 증오를 아십니까. 그게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무렵, 친구는 질문했고 나는 당신을 마주했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반쯤 진실이고 반쯤 거짓입니다. 시간은 지나치게 짙은 감정들을 반드시 희석시키지만, 흘려보냈다고 믿었던 것들을 다시 실어오기도 합니다.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물살은 그런 법이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퍽 반가워했고, 그간의 불행을 고백했습니다. 아니, 분명 즐거이 이야기했지만 나는 당신이 자신도 모르게 자백해 버린 불행을 감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꿈꾸던 하늘에 가까워졌는데, 참으로 찬란한 꽃봉오리가 되었는데 당신은 왜, 행복하지 않았습니까. 잔잔하게 그려지던 대화의 그래프가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겐 너무 해로운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당신의 행복을 저주했는데 나는 왜, 기쁘지 않았습니까. 입에 든 것들이 점차 무거워지고 거북해져서, 당신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는 한동안 침묵했습니다.
❝ 솔직히 말해도 돼? 나는 이제 더 만나고 싶지 않아. ❞
괜찮냐고 물었던 친구는 결국 그렇게 실토했습니다. 삼키지 못할 증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그냥 뱉어버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로든 쓸려 나가도록 길바닥 어디에든 뱉어버리고 나면, 더는 턱 아프게 씹지 않아도 되고 애써 목 뒤로 넘기려 힘줄을 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동조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다의 반대말을 아십니까. 한때 애정했던 드라마에서 흘러나온 구절이었습니다. 그것은 '미워하다'가 아니라 '버리다'였습니다. 무엇이든 미워하는 중에는 사랑이란 것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오해를 잘게 부수는 말입니다. 끈질기게 미워한다는 것은, 미움을 버리지 못하고 속에 품고 견딘다는 것은 한 번 더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나의 남루한 의지였습니다.
사랑하다의 반대말은 미워하다가 아니었어요. '버리다'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버렸다고 여길까 봐 두렵습니다. -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
뱉으면 잊히는 사람, 놓으면 버려지는 사람인 것은 누구에게나 불행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아침 일찍 부지런히 일어나기 위해 베개를 주먹으로 때리고 잠에 듭니까. 자신의 옳음을 위해 다른 사람의 그름을 잔인하게 들추어 냅니까. 보다 더 높은 층의 하늘을 올려다봅니까. 그러면서도 언제든 고꾸라질 뿌리 없는 꽃입니까. 가엾게도. 스스로를 기어코 그 방향으로 몰고 갈 작정입니까.
그러나 혹여 더 이상 행복을 꾸며낼 수 없을 만큼 외로워지는 날이 와도, 완연히 버려졌다 생각지는 않기를. 아직 미적지근한 당신의 이름을, 쓴 물 다 빠진 증오를, 볼 안쪽에 밀어둔 채 이따금 건드리고 있는 현재의 내가 이렇게 씁니다.
당신을 미워합니다. 지치지 않고 미워할 것입니다. 끝끝내 저버리지 않기 위해, 다음 기회에도 당신을 대면하러 가기 위해. 그다지 온당한 방식은 아닐지라도 이 또한 일종의 사랑이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