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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Mar 19. 2024

이 권태를 어찌하면 좋아,

피아노에게 보내는 장

비가 오는 날이면 중얼거렸지. 마음만으로 충분한 관계가 어딨어, 하고.


그러면 당신은 어떤 곡조를 내어놓을까. 관계를 성립하는 것까지는 마음의 몫이었으나 그것을 연장해 나갈 힘은 망설임 없이 부르트고 멍울질 손가락에 있었음을 기어코 받아들인 나에게. 제 아무리 크게 틀어놓은 음악도 악지르는 빗소리에 묻혀 귀 뒤편까지 닿지 못할 터였다. 어차피 위안을 주고받을 수 없는 사이에 다다르고야 만 우리였다.


음악 하는 사람이라 그래, 비 온다고 우울해하고. ❞


그런 말을 들으면 염치도 없이 맞장구를 치고 싶었지. 당신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당신을 힐난하는 것으로 내가 아직 당신과 꼭 그만큼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노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싶었지.


그러나 나의 오랜 일기장은 무수한 거절의 음표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끝내 발을 뺄 심산이었다면 내가 왜 당신을 욕심내게 두었어. 부정당한 자아를 카펫처럼 납작 깔아놓으면 당신은 나의 왼손을 가져다 제 입술 위에 얹었다. 뻐끔뻐끔 노래하는 그 입-바흐와 부조니의 샤콘느를, 베토벤의 비창 2악장을, 쇼팽의 발라드 4번을,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발음하는 그 야속한 입. 나를 조롱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 위로가 아니라 기만이라는 것을 당신은 정말 모르나.


우리는 이미 몇 번 서로를 포기한 적이 있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이제는 알아, 내가 당신과 멀어져 있게 된 시간 동안의 공백이 단 '몇 달'이거나 '몇 주'이거나, 심지어 '며칠'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새로운 레슨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고, 다음번의 기회가 올 때까지 충분히 손끝에 남아있는 감각만을 붙들고 연습에 매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그리하지 않았던 나와 그런 나를 방목한 당신의 잘못이지 않겠.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 남은 것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소유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당신을 두고 떠나야 했고 당신은 새로 구애하러 찾아오는 이들을 상대해야 했으니, 자연스레 지지부진한 관계는 끝이 났다. 맨들거리는 손바닥 아래로 미끄러져 빠져 나간 당신이 언젠가 다시금 사무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난한 아쉬움에 무슨 힘이 있겠어. 단 몇 줄의 선율로 당신의 환심을 살 순 없었다.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다 한들, 이대로의 고리타분한 당신과는 3분짜리 춤곡 하나도 채 끝마치지 못할 것만 같았거든.


이 권태를 어찌하면 좋아. 무대에 오르는 일을 계단 오르듯 거듭 저지르고 싶어질 때면, 쏟아지는 조명빛 가운데 침묵하는 당신이 보였다. 내가 당신 어깨에 손을 얹고 당신 손을 나의 허리에 얹어 달라고 하면, 기꺼이 그리 해줄 것을 알았다. 몇 스텝 왼쪽으로, 또 몇 스텝 오른쪽으로, 이번에는 사선으로-지시하는 대로 곧잘 따라와 주리라.


그렇지만 어쩌다 발을 꾹 밟아도, 손마디가 잠시 휘청거려도 모든 망신은 나의 몫. 그리고 허둥지둥 당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검고 무감한, 다가갈수록 나만 비치는 망연한 얼굴. 당신은 나를 파트너로 보지 않는구나. 우리의 춤에는 무게가 없었고, 서로의 어깨와 허리에 올려놓은 손들은 계속 헐거워지다 벗어나고 엇갈렸다. 음악이 끝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뒤돌아 각자 퇴장해 버릴 것처럼.


나는 왈츠를 왈츠답게 추는 사람들이 부러워. 당신에게 몸을 실어도 당신을 망가뜨리지 않고, 당신 가까이 귀를 붙이면 벌렁이는 자기 귓속이 아니라 당신이 내는 진실된 소리가 비치는 사람들이 정말이지 부러워. 내가 당신을 주저하던 시간 동안 갈라진 손끝을 피날 겨를 없이 핥으며 보내온 그들이, 마침내 당신에게 간택받는 그들이, 무대의 막이 내리면 당신과 서로 마주 보며 뿌듯한 웃음 지을 그들이, 나는 자꾸만 그려져. 일기장의 오선들은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늘어져 앉아있던 누군가의 주름진 세월처럼 겹겹이 흘러내리고, 차츰 음악과는 일별 하는데.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 1854년, 슈만이 클라라에게.


오늘은 나의 손을 직접 나의 입술에 붙이고 슈만의 유령변주곡을 불렀어. 설마 슈만이 클라라에게 생애 마지막으로 던져준 고백이 정녕 저것뿐일까.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을 꼭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관계를 충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도무지 이 마음은 사그라들지를 않는다는 완곡한 호소였다. 비극이지, 비극이야. 이토록 쓸모없이 내보여지는 마음이라니. 당신과 더는 어떤 미래도 이루어갈 수 없어, 외치고 뛰쳐나가는 등판에서 사랑을 읽어버리고 마는 이의 비극이라니.  


그러므로 제안하고 싶어. 당신은 단지 당신 몫의 권태를 이겨내고 나와 단 한 곡만이라도 충분히 함께해 주면 좋겠다. 빗줄기가 어김없이 쇼팽을 불러오는 한, 당신이 입술로 짓이기는 곡조를 나의 손바닥이 읽어내는 한, 내가 죽도록 사랑한단 말 대신 손가락을 들어 내리치는 법을 기억하는 한. 그 정도의 선심만이라도 허락해 준다면 나는 족할 것 같아. 멋들어진 조명도 관객도 없는 무대를 준비할게. 버려진 어느 방구석에서 정다웁게 왈츠를 추자. 무미건조한 눈 맞춤이래도 나는 감사할 테야.  


럼 이만, 줄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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