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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Jun 28. 2024

당신이란 숲에 사는 모두가,

닮고 싶은 어른에게 보내는 장

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구든 언제든 들러 안식할 수 있도록 마음에 들였다가, 또 때가 되면 홀연히 떠나가도록 놓아줄 수 있는 사람이요. 


꿈의 첫 모습은 그러했습니다. 철저히 홀로 고립되는 꿈이었습니다. '받는 사랑'으로부터, '기대하는 마음'으로부터, 눈물샘의 둑을 허무는 모든 섬약한 감정들로부터. 충분한 양의 양분을 한데 가두어 놓고 흠뻑 먹여 기른 비옥한 마음밭, 그러나 누구도 여기 오래 머물러 살지는 못할 것이었습니다. 질 좋은 소산물들을 소외되는 이들 없이 전부 나누어 주고 나면 모두 돌려보내야 했으니까요. 다들 양손 두둑이 챙겨갔으니 제법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홀로 남아 헐벗고 척박해진 내면을 견디는 이후의 날들은 서늘하고 고독했습니다.


당신은 바다처럼 다가왔습니다. 나를 널따랗게 둘러싸곤, 이따금 발등 위까지 올라와 찰랑거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있으므로 미풍이 분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찬 공기에 쓸리는 외로움이 쓰라려 뒤척이던 밤을, 가만 지켜봐 주는 그 눈길 한 자락이 얼마나 쉬이 잠재우는지를요. 섬에게도 바다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 무렵, 나는 섬으로 살기를 포기했습니다.


바다가 되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든 언제든 밀려가서, 섬 같은 사람의 곁마저 지킬 수 있는. 당신 같은 바다를 꿈꾸었습니다. 사랑하기로 작정한 이들을 결코 돌려보내지 않고, 등지고 돌아 앉아있는 시간을 확보하지 않고, 당신은 어떻게 마르지 않는 바다일 수 있습니까. 썰물 때의 당신에게 넌지시 물으면 당신은 바특하게 웃어 젖혔습니다. 그리고는 질퍽한 속을 호탕하게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어제도 누가 그 속을 함부로 밟아대서 고르게 다져놓은 면이 다 울룩불룩해졌다고, 숨김없이 전부를 보이면서. 다시 물을 끌어다 펼칠 생각에 부아가 치민다며 농담조로 말하는 당신은 정말로 무탈해 보였습니다.


드러내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더 많은 이들을 떠나가게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만의 삐뚤빼뚤함으로도 누군가에게 넘실거리는 바다가 되어준다는 사실을, 당신에게서 배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까무러치고 말았을 텝니다. 그러한 몇 개의 작은 진실들을 깨우치는 것만으로 자주 의기소침해지는 탓이었습니다. 어른이란 자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신망을 얻어 되는 것인 줄을 그때쯤 알았습니다.


당신을 신망했습니다.


나는 나보다 병약한 한 사람도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나의 무력함에 종종 앓아눕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책임져주겠다 약속한 적 없는, 그러나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그 말을 책임지는 당신의 사랑 방식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사랑의 말도, 책망의 말도 함부로 부리지 않는 당신을, 언제나 자신의 뭍을 먼저 내보이는 당신의 현명한 겸손함을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포말이 향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금세 꺼져버린다 해도 좇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품속에 들인 것들을 재우는데 오래 걸려 잠이 늦는 밤에는 당신도 그러할까 궁금했습니다. 당신은 불면을 들여 책 읽는 일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노래 알아?


그런 당신의 지난한 밤에 편승했던 어느 날의 화두였습니다. 답지 않게 과묵하던 당신의 말소리 대신 차 안에 은은히 퍼지던 노랫말.


난 저기 숲이 돼볼게.
넌 자그맣기만 한 언덕 위를
오르며 날 바라볼래.
나의 작은 마음 한구석이어도 돼.
- 최유리, 숲


좋아하는 노래라고 대답하자 당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시원하게 웃었습니다.


나는 이 노래가 꼭 내 삶 같아. 


'숲'이 되어보련다는 나의 바다를, 나는 한동안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숲. 숲이라고요. 귓불을 축축이 적시는 가사에서 풀내음이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 뭍 위의 바다인 줄 알았던 당신은 사실 땅이고 숲이었습니까.


당신이 언젠가 나를 나무라고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나무는 뿌리를 박아내릴 땅만 있으면 백 년이고 천년이고 가지를 뻗치고 자라 무성해질 수 있었습니다. 자랄 만큼 자라고 나면 그 품에 새들도 몇 마리 들일 수 있을 테고요. 내 가지가 그다지 튼튼하지 못해 작은 새 한 마리를 떨어뜨린다 해도, 그 떨어진 땅이 당신이리라 여기니 퍽 다행이었습니다. 날갯죽지 꺾인 새는 당신의 보드라운 땅에 깊이 심겨 다시 또 하나의 나무로 자랄 것이었습니다.


끝없이 생명이 자라나는 땅. 숲이란 그런 곳이었습니다. 누가 다치고 넘어져도, 그 패인 지점에 뿌리를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곳. 문득 모두가 그렇게 나무가 되었음을 실감하고는 아연해졌습니다. 당신이란 숲에 사는 모두가, 헐벗고 부러진 자신을 묻고 다시금 움튼 이들이었음을.


내일쯤엔 숲이 되기를 꿈꿀 것 같았습니다. 바람이 한번 휘저어 놓을 때마다 수백 수천 그루의 사연들이 우수수 진동하는 당신의 긴긴 밤을, 어떤 고립도 표류도 파괴도 내버려 두지 않고 정착할 모서리를 내어주는 당신의 너른 땅을, 나는 빽빽하게도 닮고 싶었습니다.


당신도 아직 과정 중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렴 당신의 끝은 지지리도 멀고 아스라해서, 멀리 넘겨다 보자면 여전히 바다로 착각할 만합니다. 몇 그루나 더 심을 셈이셔요, 장난이랍시고 경탄하면 늘처럼 호쾌하게 웃어주시렵니까.


그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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