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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Aug 31. 2024

당신은 무엇으로 살기에,

그만두는 법을 잊은 이에게 보내는 장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친절함을 고집하는 그 목소리. 이전에 알아오던 것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그러나 이제 곧 부수어질 목소리의 당신이었습니다. 너무 반듯하고 태연해서 싫었던 적이 있다면 실례입니까. 언젠가 그런 말을 자복하고야 말았던 적도 있는 것 같아 서둘러 미안했습니다.


우그러진 곳 하나 없는 당신의 네모난 다정함을 무작정 싫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을 그렇게나 완벽하게 손질하기 위해 스스로 우그러지는 당신의 철두철미함이었습니다. 누구 하나를 사랑하기 위해 캘린더에 그의 이름을 적어 넣어야 하는 사람. 허울뿐인 다정을 포장까지 예쁘게 마쳐 계획한 날에 선물해 주고야 마는 사람. 그 누구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당신을 보며- 손에 들린 것이 곧 거품처럼 꺼져버리리란 사실을, 당신이 곧 걷잡을 수없이 퍼석해지리란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을 텝니다.


퍼석해진 당신이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퍽 놀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너진 목소리로도 끝끝내 친절을 꾸며내었으니 나 또한 내어줄 진심은 없었던 겁니다. 당신은 여전히 좌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납작 엎드러져 제 울음에 미끄러져가며 기도했다던 당신은, 붙잡는 모든 갈래의 길을 등지고 그렇게 이 삶을 선택했다는 당신은, 그토록 짓무르고 냄새날 때까지 방치되던 마음들을 정녕 몰랐습니까. 도무지 썩지 않는 당신의 애씀에 혀를 내둘러버린 마음들을 모르겠습니까.


무얼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


그런 모양의 한탄만은 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무얼 어떻게 더 하지 않아서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좁은 캘린더 칸에 갇힌 이름들을 풀어줄 줄을 모르고, 그들이 어디로 목말라 찾아가는지 따라가 볼 줄을 모르고 당신은, 당신은. 왜 전부 손안에 두고 사랑하려 합니까. 당신은 무엇으로 살기에, 언제부턴가 멈출 줄을 모르고, 그만둘 줄을 모르고, 그렇게 고여버린 늪 속에서 질겁스레 버티고 더 깊숙이 발버둥 치기만 합니까.


당신이 지표면 위로 호흡하는 법을 완연히 잊지는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이미 죽은 물로만 내내 숨 쉬고 있던 것은 아니겠지요. 제발요.


생눈으로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얼마나 황홀한 일이었는지, 이것 좀 보라고 어깨로 다른 누구의 발을 밀어 올려주기 위해 늪 아래로 뛰어들었던 당신은 이제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이 지치지도 않고 발버둥 치는 동안 곁에서 구정물을 잔뜩 뒤집어쓴 이들을 탓하게 되기 전에, 눈이 새카맣게 가려져 하늘을 잃은 이들에게 너도 나도 다 잘못이라며 악쓰게 되기 전에, 이만 손과 발과 입을 모두 버려두고 가라앉아야 합니다.


정말로 폐가 터지기 직전까지 숨을 참다 보면, 한없이 추락하고 추락하다 보면, 다시 딛고 튀어 오를 수 있는 바닥이 찾아올 것입니다. 빛 한 점 들지 않고, 어떤 목소리든 멍멍해져 더는 아무것도 꾸며낼 수 없게 되면, 당신이 모르는 새 그곳에 먼저 가라앉아있던 인영들을 만나주세요. 하늘의 빛깔이고, 구름의 형상이고 뭐고 다 잊어가는 영혼들을-딸, 아들 같은 호칭이 아닌 그들의 온전한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다시금 위로 떠오를 수 있도록 발바닥을 밀어주세요.


녹조를 가르고 떠오르는 이들을 한 명 한 명, 올려다보다가, 아무것도 탈피하지 못한 당신은 불현듯 서럽고 외로워질 것입니다. 그 옛날 당신이 까마득히 잊은 방식으로 통곡할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 눈물이 너무 많고 맑아서, 늪의 일부를 해감할만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과 내가 서로 달리 기도하던 꿈이 그렇게도 무력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참말 좋겠습니다.


❝ 기도만 해줘. 부탁할게. ❞


러겠다는 화답만은, 진심이었습니다. 당신이 못내 고생스러워지기를 소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퉁퉁 부어오른 당신의 아가미가 이제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닌, 당신이 사랑하려던 이들을 위해 낫기를 소망할 따름입니다. 사랑이 더 이상 우후죽순 오배송되지 않기를, 우리 모두가 그렇게나 허탈한 메시지만 받아보며 살아가지 않기를.


여태껏 오래 걸린 만큼 오래 걸릴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몇 명이나 더 당신의 허벅지에 달라붙어야 마침내 힘줄을 끊을 수 있을지, 서로를 지상으로 밀어 올리지 못한 채 저 아래 잠겨있는 이들이 언제까지 부식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을지 정말이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안쓰럽지도 않아. ❞


또 하나의 대화 건너편에서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안쓰러움이란 종류의 사랑으로 내가 당신을 설득하는 동안에, 그는 실망하고 분노할지언정 자리를 뜨지 않고 지키는 종류의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아직 누구를 실망시킬 기회가 남아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당장 막아설 순 없어도, 물을 다 퍼낼 순 없어도, 늪 바깥에서 숨 벅차 올라오는 손들을 내어 잡아줄 마음들이 당신 부근에 남아있음에.


기다립니다. 그들 모두를, 그리고 종국에는 당신을.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나눌 때에 서로의 얼굴을 즐거이 마주할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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