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같은 곳에서 살자고,
고마운 친구에게 보내는 장
너는 언제나, 요즘은 어떠냐고 묻지. 그 질문은 네 입을 통해서만 오롯이 나에게 온다. 나는 언제나, 그것이 너의 은사라고 믿어. 수십 개의 안부들이 무람없이 우편함에 꽂히는 요즘들 사이, 너의 것만은 은둔을 뚫고 침투해 착신 전환을 일으킨다. 대답할 수밖에. 순순히 대답하고, 또 너는 어떤데, 하고 와락 묻는 수밖에.
나의 요즘은, 그러니까, 안부에도 목적이 있음을 실감하고 있어. 잘 살고 있다고 흔쾌히 긍정하기엔, 어쩌면 지금 나는 퍽 낡고 남루해진 상태거든. 이따위의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을 질문들로부터 쫓기듯 달아나며, 거짓됨이 발각되기 전에 나만의 골방으로 숨어들지. 잘 살고 있는 듯 보이는 나를 마냥 부러워하고 싶은 사람이나, 자신의 잘 살고 있음 혹은 잘 못 살고 있음을 확인받기 위해 말을 거는 사람들의 속 빈 안부들이 문 앞에 잔뜩 쌓여 있다. 비바람이 칠 때마다 사방팔방 굴러다니며 서운하다는 목소리를 내.
❝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서운하게. ❞
❝ 연락 좀 하고 살자. ❞
야트막한 너스레로 둔갑한 서운함이란, 너무도 간사하고 유해해서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안타깝게도 텅텅, 빈 곳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 말하는 내용까지는 내게 잘 닿지 않아. 귀를 틀어막는 심정으로 문고리를 그러쥐고 버티면, 귀신같이 네가 당도한다. 창호지 바른 문짝처럼 편편한 낯짝에 쏙 구멍을 뚫어 깊숙이 들여다보며, 반드시 괜찮냐고 묻는 네가 온다.
네 손에 이끌려 새벽 공원의 내리막을 내달렸던 그날 말이야. 나는 그만 무서울 정도로 웃음이 났다. 곁을 붙이고 앉아 함께 펑펑 울어줄 누군가 필요했었는데, 너는 그 차가운 새벽의 한가운데 나를 반바지 차림으로 던져 놓고는 깔깔 웃어 젖혔으니 말이야. 울음이든 웃음이든, 나를 박살 낼 거리가 너에게는 충분했다. 제 아무리 질기고 두터운 창호지도 네 뾰족한 관심 한 번이면 숭숭 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그러면 나는 속절없이 그 구멍으로 끌려 나가고 마는 거야. 언제나, 반드시. 남몰래 방구석에 켜켜이 쌓아둔 모든 이야기를 단숨에 빼앗기러.
언젠가는 같은 곳에서 살자고, 아니어도 꼭 주변이 되자고, 농담처럼 나누던 기약을 너는 왜 여전히 간직하고 있니. 서로가 이제는 너무 멀리 있어서 그 추억이란 정말로 완연한 농담이 되어버렸는데.
너는 지치지도 않고 계획을 펼쳐 든다. 너답게 무척이나 이상적이고, 동시에 참으로 상세한 계획이야. 바다가 있고, 풀숲이 있고, 누구도 일어나 내일을 살러 가라고 닦달하지 않는 어느 한가한 시간대에 나란히 길게 누워-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대상들을 저만치에 놀게 두고 관전하는 일상. 참으로 무용하고 안온한 그림이잖니. 할머니들 같지. 자식도 인생도 키울 만큼 다 키워버린 다음, 더 이상 여느 때의 전부인 줄 알았던 것들에게 실망할 필요 없는 나이대가 되면, 그러면 그때는 우리 정말 그렇게 살 수 있는 거야?
땡볕 아래서 헐렁한 일바지를 입은 네가 밭일하는 상상을 해. 해가 잘 익은 연시처럼 뭉그러질 때즈음 잘박 잘박 돌아와서, 함께 일한 사람들과 있었던 이야기들을 보따리째 풀어놓으면-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글을 쓰던 내가 쓸만한 소재들을 쪼아 먹다가 사레를 들리고야 마는, 그런 상상이야.
어쩐지 그런 상상은 당장 꿈꿀 수 있는 미래보다 힘이 있어. 때로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와도, 손이 조금 못나고 투박해진대도, 너와는 그럭저럭 오늘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피투성이 얼굴로도 웃어버릴 수 있던 언젠가의 오늘이 있었잖아.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내가 오그라든 무릎을 펴지도 못한 채 굽은 잠을 자던 언젠가의 참담하고 시린 오늘 속에서, 나를 흔들어 깨워줄 네가 다른 층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곤 했으므로.
별 것도 아닌 대화를 조각내어 뺨이며 목덜미에 붙여 두었다. 한참 간 볕을 쐬던 마룻바닥 마냥 은은하고 따뜻해. 그러니 괜찮다고 말할래. 네가 있으므로 나는 괜찮아. 언젠가 내가 걸어 잠근 것이 자물쇠 열 개쯤 달린 철문이 될지라도, 기꺼이 송곳으로 등장할 너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너는 아무것도 의도한 적 없다는 듯 영문 모를 표정을 지어 보이겠지만. 비단 내 믿음의 차원이 아니야, 실은 그저 너의 은사를 수용하는 일에 가깝다. 적어도 나에게 너는 그런 사람이야. 못 말리는 사람. 당해낼 수 없는 사람. 너의 계획에 느슨히 동조하다가도 불현듯 부풀어버리는 이유야.
❝ 하지만 우리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겠지. ❞
편지 한 귀퉁이에 적었던 글 한 줄이 남는다. 어린 날 한 평짜리 둘만의 텃밭에서 우리가 무수히 많은 '언젠가'들을 염려로 키워낼 적에. 마땅히 추수할 것이 없으면 쉬이 시무룩해지던 나와 다르게, 썩은 뿌리를 들어낸 자리에 대신 '언제나'를 심던 너를 나는 영영 잊지 못할 테다. 그 어느 외로운 밤에 살아서도 영영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철문을 부수고 뚫는 아주 날카로운 사랑이, 평생을 가고야 마는 아주 집요하고 꾸준한 사랑이 세상 어딘가에, 내 좁은 삶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그런 사랑이 되어버린 너는 요즘 어때. 보러 오겠단 말에 희망을 감출 수 없는 나의 답신에는 고쳐 쓴 흔적이 너무 많아 지저분하다. 그러나 너에게도 조금이나마 웃을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어. 이 마음마저 네가 알아주어야겠지.
그럼 이만, 줄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