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생이었소,
광복을 믿었던 이에게 보내는 장
그래, 꽃길은 잘 즈려 밟고 가시었소.
그것이 연정이었는지, 온정이었는지, 역정이었는지 과연 알 수 없었소만. 구둣발에 무참히 뭉개져 어떤 마음이었나 알아볼 수 없게 되어도, 꽃잎 짓이겨질수록 무성해질 향내인 줄 내 알고 깔아 두었소.
온다던 봄은 그 옛날에 벌써 왔답디다. 강물에 비친 해를 뜰채로 건지려 허덕이던 겨울, 빙하기처럼 길고 지난했던 그 겨울이 다 가고 말이오. 갈비뼈 드러내고 말라비틀어진 사람들이 빠져 죽어가는 중에도 그네는 해가 매일 뜨고 거기 있으니 언젠가는 건지리라 하지 않았소.
태양을 바란 죄목으로 타 죽어간 벗들을 마침내 만났소?
모두 한데 둘러앉아 종일 읽어야 할 서신들이 한가득이오. 시퍼런 철창이 열리고 볕 들 때 이 날개 돋친 순백의 서신들이 한참을 쏟아져 나왔다 했소. 강제로 심장을 도려낸 가슴속에 그네들은 끝끝내 태양을 미어터지도록 밀어 넣었지. 헐고 삭아빠진 속내를 달래며, 피투성이 잇새로 찍어낸 구원의 언어들. 냉동인간처럼 꽁꽁 갇혀 잠들어 있다가 벗들을 따라왔나 보오.
오래도 걸렸소. 무고한 과거들이 처형당하는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시들이 무수히 태어나며 울어 젖혔는지. 죽어도 죽어도, 태어나도 태어나도 변찮는 정경 속에서. 무참히 흐르던 시간이 세어 보니 수십 해 아니오. 남루한 배 한 짝 띄워 겨우내 생을 부지하던 외진 그네가, 저 먼 끝에서 밝아오는 봄을 제 눈으로 맞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소.
그네들도 참.
고달프지 않았소?
여기저기 구멍 나고 누추해진 몸에서 그 모든 세월이 알알이 빠져나가는데도, 간밤에 촛불처럼 잠 못 들고 떨며 지켜낸 모든 희망이 사정없이 학살당하는데도, 그네들은 참. 스스로 살아 버텨내지도 못할 비통한 생을 머리에 들어 쓰고, 어떻게 이다지도 먼 역사의 우주에 묻힐 욕심을 내었지.
그네는 비로소 벗들과 어깨 붙이고 앉아 환히 웃겠구나. 한 마을 같던 이들이다. 같은 시각에 맞추어 등불 피우고 끄며, 지붕 무너져라 눈 내리던 한겨울-마음을 합하던 사람들. 쌀통, 기름통이 다 비어 가는데도. 길거리에 버려지는 목숨들이 요란히 나뒹구는데도.
서로의 이름을 주워다가 기워 입던 옛 몸을 버리고, 눈부시게 희어진 새 몸의 서로를 맞이했소?
이이도, 저이도, 그이도, 모르지 않았지.
이 일생 근근이 아껴 연명하더라도, 어쩌면
산 눈으로는 보지 못하리란 사실을.
삼킨 불덩이가 너무 뜨거워 울컥일 때
땀 흐르는 뒷목에 총구 놓이면, 그만
뱉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말일세.
잘도 알았지.
사랑하는 이들이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지고
이마에 핏발 서고 입술 비틀어져도
그 노랫말, 결코 잊지도 멈추지도 못하리란 것을.
꽃물 든 그네의 얼굴, 발갛다. 썩혀 둔 역사의 뒤편에서 나는 잡내를 해감하는 꽃향기. 콧속이 시큰거리는 것은 지독히도 짙은 그 향 때문이라 하겠소. 내 눈물 한 방울도 아니 흘릴 것이오. 노래 한마디 끝마치기도 어려울 테니.
내 또한 언젠가 이 광활한 우주 한켠에 묻히는 날까지, 그네들 부디 흰 옷에 물든 꽃물처럼 지워지지 않고 끈질기게 기억되는 얼룩이길, 다만 바라오.
열매 하나 뭉그러져 땅에 떨어지고, 또 거기서 싹 내고 꽃 틔워 또 하나의 열매를 맺어가듯이. 헛되지 않았다 말하오. 아름다운 생이었소.
그럼, 이만 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