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마루와 할아버지
화단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던 살림집은 80년대
시골집 치고는 신식 주택이었다.
널찍한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왼쪽으로는 할머니
방과 작은 부엌이 오른쪽으로는 안방과 큰 부엌
그리고 작은방이 붙어 있었다. 많이 희미해지고
빛바랜 기억 속에서도 공간과 함께한 많은 추억은 오래도록 밝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대청마루는 요즘의 거실과 같은 복합 공간으로 함께 모여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낮잠도 자고, 언니들과 공기놀이도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곳이다.
하지만 그곳은 할아버지가 피 토하고 쓰러져 돌아가시기도 한 곳으로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공존하는 공간이다. 당시 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나보다 두 살 위인 4학년이었던 언니의 기억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이었는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뒷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빨리 집에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장면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아득히 먼 기억 속 나의 모습은 파란 대문을 뒤로한 채 빨간색 책가방을 메고는 안마당에 서서 멍하니 대청마루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주위는 조용했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롯이 나 혼자 우두커니 서 있던 장면이 사진처럼 강하게 남아있다. 둘째 언니가 그러는데 서둘러 집에 왔더니 이미 일가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고 한다.
진짜 슬퍼서 우는 사람과 그냥 형식적인 곡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한데 섞인 체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치 교통사고로 인해 일부분에 대한 기억이 손상된 것처럼 어린 나에겐 그 상황이 흡사 교통사고와 같았던 것 같다.
너무 어릴 때라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졌다시피 하지만 안개 같이 흐릿한 기억 속의 할아버지의 모습을 더듬어 보면 마을의 큰 어른으로 인자하고 점잖으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술을 안 드셨는데 반해 술을 너무 좋아해서 소소한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던 큰 아들 정확하게는 우리 아빠가 야단맞던 모습도 기억난다. 그런 할아버지가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너무나 갑자기 돌아가셨다. 티켓까지 사두셨는데 올림픽도, 밤나무의 싱거운 왕밤맛도 못 보고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죽음은 가족 모두에게 충격이었지만 특히 할머니의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두 분이 워낙 사이가 좋으셔서 동네에 소문난 잉꼬부부셨는데, 남들은 남사스럽다고 내외하며 손도 잡지 않던 시대에, 양복을 잘 차려입은 할아버지와 예쁜 꽃원피스를 입고 있던 할머니는 팔짱도 모자라 손을 꼭 잡은 체, 전국 방방 곡곡을 누비고 다니던 모습이 박제되어 사진으로 많이 남아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청마루에서 일 년 동안 상을 치렀는데, 엄마는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할아버지 영정 사진이 올려진 제사상 앞에 삼시세끼 따뜻한 밥과 음식을 해서 올렸고, 그 뒤에서 할머니는 매일매일 구슬프게 울고 계셨다. 그나마 간소화되어 삼년상이 아닌 게 어디 냐마는 일 년 동안 자그마치 1095끼를 올린 엄마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엄마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여러 권의 책을 빼곡하게 채워도 부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