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친구, 사비
"연이 주무관님! 왜 4B연필을 쓰세요?"
연이는 솔이 주무관님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생각의 시작은 2016년 1월 어느 날로 연이를 돌아가게 했다.
인수인계를 받을 때 전임자가 연필을 들어 수많은 숫자 끝부분에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짧은 빗금을 치며 확인하는 작업이 전문가처럼 느껴졌다. 예전 화가들이 구도를 잡기 위해 연필의 끝부분을 그리고자 하는 사물에 갖다 대는 것처럼 아주 멋지게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날은 연이가 휴일에 나온 날이었다. 그 주에 못다 한 일도 있었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는 아주 큰 장점에 휴일에 나와서 초과근무를 하는 것을 자처했다. 김밥 두 줄에 커피 한 잔이면 연이에게는 몇 시간이고 즐거운 공부시간이 되었다. 전임자가 놓고 간 필기구를 연이가 편한 방식대로 쓸 만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한 후 사무용품 맨 아랫칸에 사용하지 않는 필기구 통에 넣었다.
전임자처럼 멋지게 연필을 잡고 빗금 체크를 하며 서류를 살펴보는데, 영 신경이 쓰이는 게 있었다. 연이는 그게 처음에는 뭔지 모르지만, 영 불편하기는 했었다. 연필이 딱딱했다. 정확히는 연필심이 딱딱해서 종이와 닿으면 종이에 칠을 하는 그 부분에서 나는 미세한 마찰음이 연이를 신경 쓰이게 했다. 왠지 딱딱한 행정실에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연이가 있는 것처럼 연이가 멋있다고 생각한 연필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폼나는 그 연필은 연이와는 맞지 않았다.
사무용품이 있는 캐비닛을 열어 아까 놓았던 맨 아랫칸 주인을 잃은 사무용품 중에 연필을 모두 연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저마다 키가 다른 형형색색의 연필들이 올라왔다. 나머지는 필기구는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이면지에 연필 하나씩 빗금을 그으며 연이가 원하는 연필을 찾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없었다. 모두 같은 심을 쓰는 연필이었는지 모두 같은 마찰음과 서걱거리는 소리가 연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 다 아까 그 자리에 놓고 사무용품 캐비닛을 닫으려다가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몽당연필이 보였다.
4B연필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그 스케치 용도로 사용하는 연필.
아마 학생들이 복도에 떨어뜨려놨던 것을 주워와서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녀석인 것 같았다.
연이는 몽당연필이라 버릴 생각으로 캐비닛에서 꺼냈다.
옛날 생각이 났다. 예전 없을 시절에는 몽당연필의 끝을 일정 부분 칼로 깎아서 모나미 볼펜의 펜대에다가 끼어 썼다고 했다. 사실 연이의 나이도 만만치 않은데, 그 시대는 아니었다. 이제 버리는 모나미 볼펜도 있고 몽당연필도 있어서 끝부분을 조심스럽게 깎아 모니미 펜대에 꽂았다. 나름 그립감이 좋았다. 내친김에 종이에 슥슥 빗금을 긋기 시작했다.
'어라, 이 느낌은 뭐지? 이 부드러운 느낌, 이 사각사각거리며 쫀득하게 달라붙는 느낌'
연이가 찾던 그 느낌의 그 마찰음이었다. 딱딱하고 뻗대는 느낌이 아닌 종이의 살짝 거친 부분을 따라 연필심이 닳면서 내는 소리는 연필을 꾹꾹 눌러쓰던 어린 시절을 상기시켰다. 연이의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래, 앞으로 너로 정했다. 나랑 앞으로 쭉 같이 가자.
4B. 사비야.
ABOUT "교행, 학교다녀오겠습니다 시즌 3"
5년 전 연이가 교행직 합격 후 행정실에서 근무하면서 겪는 또는 겪을 만한 일을 '수필형 소설'로 작성한 글이다. 시즌 1(연이의 경험), 시즌 2(연이의 마음) 달리 연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든 것에 초점을 둔 시즌 3(연이의 기억)는 연이가 겪는 고민을 생생하게 전달하여 교행직을 그저 워라벨을 위해 들어오려는 공시생들과 교육행정직 공무원에 대한 궁금한 일반인에게 조금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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