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울컥함 하나가, 30년을 밀어준 원동력이 되다
1. 유럽 시장에 던져진 대리, 나
일은 대리가 다한다더니 나 역시 그랬다. 부서 이동을 통해 나는 에어컨을 유럽에 수출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1990년대 말, 에어컨은 한국에서도 보급률이 20%대에 불과한 신생 제품이었고, 유럽에서는 그 존재조차 생소한 시기였다. 남유럽 국가인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정도 되어야 여름 기온이 40도에 육박해 '덥다'는 감각이 있었고, 그나마 그늘에 들어가면 선선해 에어컨이 필수품으로 인식되기 어려웠다. 그런 유럽에 나는 에어컨을 수출해야 했다.
2. 신바드의 여정처럼, 시장을 개척하다
다행히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대형 법인이 설립되어 있어 본사로부터 에어컨을 직접 구매해 판매하고 있었기에 월 매출 할당을 채우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나의 임무는 새로운 바이어를 발굴해 유럽 전체 시장을 확장하는 일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에어컨 전시회에서 수집한 카탈로그와 명함을 정리해 30~40개의 연락처를 리스트업 하고, 매일 제품 소개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대표번호로 연결된 연락처를 통해 구매 담당자를 수소문하는 여정은 쉽지 않았지만, 마치 신바드의 모험처럼 그들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주요 국가는 법인을 두고 있었고, 나머지 국가는 '디스트리뷰터(디스티)'라는 중간 에이전트를 통해 거래했다. 나는 당시 담당하던 12개국의 주재원들과 바이어들에게 끈질기게 연락하며 그들의 요청사항인 To-do 리스트를 작성하고,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점차 새로운 바이어들이 생겨났고, 에어컨의 수익성을 알아본 유럽 법인의 주재원들도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알래스카에서 냉장고를 팔 수 있다면, 노르웨이에도 에어컨은 필요했던 것이다. 여름이 짧아도 여름은 여름이니까.
3. 실적과 감정 사이, 잊지 못할 출장의 기억
가장 큰 거래처였던 이탈리아 법인을 담당하던 나는 언제나 환영받는 본사 출장자였다. 법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현지 영업 디렉터와 함께 전국을 돌며 에어컨 설치업자들을 만나 VOC(Voice of Customer)를 청취하고, 본사에 피드백을 전달했다. 이 과정을 통해 제품에도 변화가 생겼고, 나는 부족한 주문을 채워 넣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지도상 구두축에 있는 바리, 남부의 정수 나폴리, 대부 영화가 생각나는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을 누비며 바라봤던 아름다운 지중해 풍경과 어디서 먹어도 맛있는 파스타와 피자, 와인은 그나마 힘겨운 출장에서의 낭만이었다. 불평이 많던 설치업자들도 본사에서 왔다는 이유로 늘 몇 대의 주문은 넣어주었으니 그저 그들의 의리가 고마웠다. 본사에서도 이탈리아는 중요 바이어였기에 지원이 아낌없었고, 나는 그 혜택을 받은 행운의 담당자이기도 했다.
물론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여름이 덥지 않으면 창고에는 팔리지 못한 에어컨이 수북이 쌓였고, 그 재고는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팔 수 있었다. 주재원과 나는 재고 처리 방안을 고민하며 보고서를 쓰고 질책을 받기도 했다. 바이어를 찾아 멀리 떠난 출장에서는 기차를 놓치고 낯선 숙박 시설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고, 막상 도착한 바이어는 규모가 너무 작아 계약조차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한 컨테이너 분량의 오더가 들어왔지만, 도착하자마자 여름이 끝나버려 재고로 쌓이고 거래가 끊긴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우리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에어컨은 유럽 곳곳에 도착했고, 설치되었으며, 점유율은 꾸준히 올라갔다. 그만큼 브랜드의 신뢰도도 함께 쌓여갔다. 당시 우리는 출장지에서 길거리의 실외기 숫자를 세는 것이 일상이었다. 시장 데이터가 부족했던 시절, 실외기의 수를 통해 자사와 경쟁사의 점유율을 가늠하곤 했다.
4. 나폴리 뒷골목에서 울컥했던 그날
어느 날 나폴리 출장에서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법인 영업 디렉터와의 미팅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뒷골목을 따라 광장 쪽으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좁은 골목길 양 옆으로 2~3층짜리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나는 습관처럼 실외기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출 만큼 빠르게 숫자가 늘어났고, 어느 순간 길가의 실외기 대부분에 우리 회사 로고가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레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이 뿌듯함은 무엇일까. 단순히 업무 성과에 대한 보상을 넘어서, 외화를 벌어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 묘한 애국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시간이 흘러 내가 부서장이 되었을 때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낼 때면, 나는 종종 말했다. 회사에서의 일은 급여만으로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고, 나에게는 그 순간이 진정한 보상이었다고.
5. 월드컵이 남긴 이별의 순간
그러나 오랜 인연이던 이탈리아 바이어들과는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전 세계 바이어들을 초청해 한국 경기를 함께 관람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나는 하필 한국과 이탈리아 경기를 이탈리아 바이어들과 함께 관람했다.
전 국민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안정환 선수의 극적인 헤딩 골로 역전승을 거두던 그 순간. 나 역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이어들과 함께 탄 귀가 버스 안은 차갑고 어색하기만 해서 두 시간 내내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다. 도착 후 그들은 준비된 식사도 마다하고 휑하니 숙소로 올라가 버렸고, 나는 겉으로는 민망하기 짝이 없어지만, 속으로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몇 주 후, 나는 에어컨 부서를 떠나 신설 조직의 부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신명 나게 일했던 적도 드물다.
일이란, 숫자나 실적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사명감을 품고 임했던 시간 속에서
나는 ‘내일 회사에 가면 무슨 일이 생길까’ 하며 설레기도 했었다.
그날 나폴리 뒷골목에서 느꼈던 울컥함은,
내 마음 한편에 여전히 살아 있고—
미래의 내가 다시 설레며 회사를 다닐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