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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의 성장 일기

작은 톱니바퀴가 큰 수레바퀴를 움직인다

by 츤데레달언니

첫 출근 첫 업무는 늘 설레기 마련이다. 그러나 처음 부서에 배치받고 내 책상이 생겼구나 하는 기쁨도 잠시, 나는 본격적인 업무 오리엔테이션을 받기 시작했다. 선배들은 나를 여러 부서로 데리고 다니며 무역 실무 교육을 시켰다. 다양한 부서의 선배들(보통 나보다 3년 선배들)이 하는 일을 들었지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시 해외 영업에 입사한 귀한 여사원 대접을 받으며 선배들의 물적 심적 도움 덕분에 회사 생활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선배들은 구내식당뿐만 아니라 외부 점심도 사주고, 회식 외에도 종종 맥주 한잔 하며 친근하게 챙겨주었다. 덕분에 나는 빠르게 회사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래도 회사 업무 교육은 엄격했다. 나의 멘토였던 C 대리님은 당시 드문 미국 MBA 출신이었다. 그는 매일 업무를 정해 주고, 메일과 보고서를 꼼꼼하게 수정해 주었다. 배경부터 업무 절차, 방향까지 설명해 주던 그는 마치 빨간 펜 선생님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들어간 그 부서는 당시 수출팀의 사관학교 같은 신입 사원에게 하이 레벨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선진화된 시스템과 조교 같은 선배님들이 있다는 그런 부서였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 한동안은 부서의 복사는 도맡아 했고, 그 외 잡무 역시 신입 사원인 나의 몫이었다.


가끔은 나도 빨리 해외 바이 어을 담당하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동기들은 벌써 수주가 어떠니, 생산이 어떠니 제법 업무를 하는 사원의 모습을 갖추어져 가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뭐 하나 하는 현타가 오기도 했다. 그러다 커피를 마시던 중 우연히 대화를 나눈 남자 선배가 자신의 신입사원 시절을 이야기했다. 그 역시 신입 때 복사를 많이 했다며 공감을 표했다. 그렇지만 뒤이어 복사할 때마다 어떤 내용인가를 눈여겨보게 되면서 물론 본인의 업무와 관련 없는 내용임에도 보다 보니 일의 어떤 흐름과 적어도 업무의 용어는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회사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작아 보여도, 결국 조직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리는 중요한 톱니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복사를 통해서 일을 보았다는 선배의 이야기에서 나는 내가 복사를 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나의 부서 선배들이 또 다른 가치 있는 일을 하거나, 혹은 복사문건을 가지고 결재를 받으러 올라가면서 또 다른 큰 수레바퀴가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회사에서 작은 일은 없다. 작은 일이 모여야 큰일이 가능해진다. 나는 그동안 하찮다고 여겼던 일들이 사실은 조직을 움직이는 중요한 톱니였다는 걸 깨달았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지금도 회자되는 인기 있었던 드라마 <미생>과 흡사했다. 해외 바이어로부터 오더를 받아 공장에 넘기고 생산과 해외로 물건 선적을 챙기며 그 사이에 발생하는 각종 바이어의 요청에 대응하는 일이라 공장, 개발, 구매, 선적 부서등 여러 부서에 전화 통화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일이었다. 나는 얼마 후 미국과 캐나다 바이어를 담당하며 매일 아침에 밤새 온 메일을 확인하고 퇴근까지 바이어에게 답을 주기 위해 관련 부서울 닦달하며 24시간 내 답을 줘야 한다는 지침을 수행하기 위해 동분 서주 하는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바이어로부터의 메일은 내가 당시 담당하고 있는 제품의 디자인을 변경해 달라는 요청이었던 것 같다. 디자인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부품 변경이 필요해서 개발 담당자에게 요청하고 언제 가능한지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부품 변경에 테스트가 지연되자 개발 담당자가 오늘 내 답변이 어렵다고 했던 듯하다. 그럼에도 담당자를 붙들고 일정 요청을 하고하고 또 했는데 결국 일정을 못주겠다는 융통성 없는 답변에 울어버렸던 일이 생겼다. 전화통화하다가 새어 나온 물기 있는 발음과 함께 황급히 전화기를 놓고 뛰쳐나갔다가 자리로 돌아온 내게 선배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누구냐며 가만있지 않겠다는 투로 개발실 담당자에 뭐라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가 그 후부터는 개발에서 어찌나 잘해주던지, 실은 그 담당자 이야기가 맞다. 테스트 기간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데, 바이어에게 Quick Response 를 해주고 싶었던 나의 과한 열정이 눈물로 되 돌아왔을 뿐이었다.


나중에서야 기다려야 하는 일과 급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구분되었고 거기에 중요한 일과 아닌 일까지 조합을 짜서 업무 우선 순위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게 된 나는 더 이상 신입 사원은 아니었다. 복사하던 손으로, 이제는 일의 흐름을 읽고 움직이는 회사원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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