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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벌써 30년이 넘었 다고 ? (1)

그때 우리는, 우리의 시작

by 츤데레달언니

퇴직 후 어느 날, 익숙한 세 얼굴이 내 앞에 앉아 있다. 여전히 웃고 떠들지만,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30년이 지났다고? 믿을 수 없다. 내게는 절친이 되어가는 3명의 친구들이 있다. 특히 나의 퇴직 즈음 근 2년 넘게 한 달도 빠짐없이 만나는 중년의 여인들인데, 우린 사회생활의 시작점에 같이 있었던 친구들이다. 각각의 가족들에겐 이 모임을 어느 대기업 그룹 입사 동기 모임이라고 한다


우리는 정확히 31년 전 이맘때 그룹여성 공채 해외 영업으로 입사 후 한 달간 동고동락을 거치며 교육을 받았었고 이후 각 계열회사로 찢어져 나와 에나는 그룹 산하 전자회사에, 제니는 화학 그리고 카티아는 물산으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었다.


당시 우리는 대학 졸업 즈음, 각종 고시 공부 – 사시, 행시, CPA, 언론 – 를 하면서 인생의 승부를 보거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수의 길, 회사 취직하여 워킹 우먼의 길, 혹은 시집-그 당시 용어로 쓰자면-가서 현모양처로 사는 길 사이에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고 있었다. 회사 취직은 대기업 공채, 공사, 외국인회사, 일반회사 등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한국 기업 리스트 책을 사서 거기에 마음에 드는 회사 30여 군데 이력서를 보내고 연락을 기다리는 지난한 4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1993년 여름 그룹 여성 공채 500명 채용 공고는 당시 전국의 여대생들을 들썩이게 했던 대기업 공채였는데, 실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던 내게도 자석같이 끌리는 공고였다. 입사 후 알게 된 사실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기업인이자 혁신의 아이콘이셨던 그 대기업의 그룹 회장님께서 여성 인재 확대를 내내 강조하시면서 생겨난 대규모 채용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후 그룹의 일반 공채에 여성 인력 비중을 늘리면서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여성 공채는 경영지원, 비서직군, 국내영업, 해외영업의 전문 계열로 채용을 했다. 당시 해외 영업은 가장 최소 인력인 30명을 뽑았었는데 그 소수 정예만 뽑는 직군에 내가 합격하는 꿈같은 일이 펼쳐졌다. 실제로 입사 후 만나게 된 동기들의 대부분은 이미 미국 영국 일본등 해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해외파 들이었다. 그중 몇 명은 뭔지 모를 이국적 분위기를 풍기며 네이티브 영어 발음을 살짝 곁들이며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어학연수 외 한국을 떠나본 적 없는 국내파였지만 갈고닦은 친화력으로 글로벌 느낌의 동기들과 입사 교육 기간 내내 즐겁게 보냈다.


우리는 그룹 공채 신입 사원 교육 프로그램으로 한 달간 합숙하기도 했는데 같은 조로 배정된 일반 공채 출신 남자 동기들과 함께 아침 7시 구보부터 저녁 식사 후 분임토의까지 매일의 일정을 보내고, 중간시험, 지방 단체 출장과 물건 파는 프로그램, 마지막 MAT라고 불리었던 수십 km의 행군을 마치고 정식 신입사원으로 계열 회사에 배치되면서 헤어지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중간에 다시 만나 해외 영업 직군 프로그램이었던 무역실무 교육도 몇 주간 같이 받았었다.


우리는 각기 부서에 배치받은 후 다른 동기들 과도 꽤 자주 만나면서 회사생활의 다양한 놀라움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만난 적도 없는 그 회사 그 부서의 상사들에 대해서 같이 험담도 마다치 않으며 끈끈한 여성 공채 '해외 영업 직군'의 결속력을 느끼기도 하고, 동기들의 화려한 연애사에 덩달아 설레기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회사에서 적응해 가면서도, 동기들과의 만남을 통해 작은 위로와 응원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점점 만남의 횟수는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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