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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벌써 30년이 넘었 다고 ? (2)

다른 길을 걸어도 우리는 여전히 함께

by 츤데레달언니

아무튼 나의 해외 영업 동기들은 부서의 유일한 해외 영업 여사원으로 선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당시 남성 위주의 조직 생활에 소프트 랜딩을 하기도 했으나 때론 그 사랑이 넘쳐 거의 매일의 회식자리에까지 참석을 알아서 해야 하기도 했다. 지금과는 매우 다른 조직 문화임은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동기들은 회식마저 회사생활이라는 가르침에 충실하게 회식에 참석하고, 술도 주량껏 마시면서 취하지 않게 보이도록 각자만의 비결을 단련하는 등 적극적으로 신입 사원 시절을 적응하고 있었다.


당시 화학 계열 회사에 입사했던 제니는 플라스틱원자재를 동남아 제조회사에 영업하는 업무를 맡았었다. 그중 한 회사가 마침 내가 담당했던 미국 수출 업무의 전자레인지 제조 공장이었다. 어느 날 말레이시아 공장장이었던 당시 김 과장님이 갑작스레 전화하셔서, 혹시 제니를 아냐고 , 제니? 아. 제 입사 동기요라고 하자마자 과장님은 너스레 한마디 하신다. 그런 줄 알고 이번에 플라스틱 가격 네고 안 하고 받아줬다고 하시며 나의 동기라 맛있는 거 사주고 보냈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실상 제니는 내 친구가 아니어도 누구나 밥을 사주고 싶어 하는 그런 제니인데.. 아무튼 그 제니가 내 동기예요 라며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 제니는 미모의 해외 영업 사원으로 7년간이나 회사에 다니다가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며 홀연히 사표를 쓰고 그 어렵다던 통역대학원에 입학해 버렸다. 몇 년 후 미모의 동시 통역사로 국제회의에 종횡무진 일하던 제니는 남편을 따라 캐나다 미국 두바이 주재원 부인으로 정착하더니 지금은 한국의 미래를 끌고 가는 대기업의 수장으로 근무하는 남편의 심적 동반자로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글로벌 시사 경제 트렌드를 놓지 않고 간간이 SNS에 감성적인 소품 인테리어를 올리면서 편안한 일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에나는 나와 같이 전자 회사의 해외 영업으로 배치되어 IT 기기 수출 역군으로 10여 년 이상 이나라 저 나라출장 다니며 막강 영업 우먼으로 활약했다. 남녀노소 불문 눈높이 대화가 가능하고 순발력 있는 입담꾼이면서 우리 중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싱글을 즐겼던 동기였다. 과장 승진에서 누락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그녀가 회사생활에서 만났던 가장 큰 사고였던 듯하다. 나와도 몇 번 만나서 같이 열받고 회사를 맘껏 욕하며 욕으로도 분이 안 풀리고 속도 안 풀렸던 것 같다. 더욱이 그때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시스템을 되짚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후일담이 있긴 했는데, 아무튼 왜 그녀였어야 했을까. 이후 에나는 MBA를 준비하고 사표를 쓰고 단출히 미국유학을 떠났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때 미국에 있었는 제니가 에나의 유학생활에 도움을 주면서 또 그들은 거기서 가끔씩 조우하며 인연의 끈을 이어 왔었던 모양이다. 유학 후 에나는 굴지의 대기업에 임원으로 HR 전문가가 되어 나타났다. 수평적인 소통의 대가가 HR 전문가로 조직과 사람을 살피더니 지금은 퇴직 후 전문 코치로 기업 코칭, 임원 코칭, 커리어 코칭등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카티아는 상사에서 증권으로 옮겨가며 일찌감치 결혼한 워킹맘으로 10년 이상 가정과 일터사이에서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면 살았다. 다행히 파워 계획러였던 그녀는 완벽한 계획을 일치감치 세워놓는 습관과 부인이라면 꾸뻑하는 남편의 자애러운 손길덕에 가정과 일 양립에 큰 무리는 없었던 것 같다. 때로는 나와도 밖에서 만나서 즐겁게 술 한잔 하면서, 증권의 업무가 채권이나 수표에 도장 찍어주는 일이냐고 무식하게 매번 묻는 나에게도 늘 웃으며 성심껏 설명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도 퇴직, 주재원 남편을 따라 싱가포르로 이주하게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요가를 하면서 아들과 남편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는 내조의 여왕으로 있다가, 귀국 후 고등학생 아들의 열혈 대치맘으로 분주하게 살았다. 지금 카티아는 대기업에 취직한 아들과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영어 강사로 애들을 가르치고, 성당에서 봉사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나, 나는 30여 년 전 신입사원 시절에 배치된 그 전자회사에서 계속 일을 하다가 임원까지 승진했고 최근에 퇴직을 하였다. 20년 이상 전자 제품 해외 영업을 하면서 그중 6년간 프랑스와 영국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나 역시 여느 동기 못지않게 부대끼는 워킹 우먼의 삶을 살았고 거기에 주말부부 보다 더한 기러기 생활까지 덧붙여 쉽지 않았던 지난날들을 보냈었다. 이 이야기들은 추후에 나만의 이야기로 계속될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입사 후 초기 사회생활의 5년 정도 부지런히 만나다가 다들 해외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국내로 들락날락 할 때 다 같이 시간 맞춰 만나다 보니, 그 이후로는 매우 드문 드문 만나게 되었다. 실은 네 명이 맘 편히 온전하게 만난 것은 최근 2년, 나의 퇴직 후면서 각자 아이들에게 해방이 되는 시기였던 것 같다. 갑작스레 우리가 왜 이렇게 계속 만나고 있을까 궁금하다.


당시 흔치 않은 대기업 여성 공채 출신, 매우 드물었던 여성 해외 영업 직무로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 그 안에서 각자 커리어의 성장, 그리고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마음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기 때문일까? 인생의 반환점을 지나 다시 돌이켜 보면, 같은 시작, 다른 항로를 달려온 우리들이 아직도 만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같은 시작 지점에 있었던 그날의 장면들과 감정들이 여전히 특별하기 때문일 거다. 그 지점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출발점이니까.


회사 생활은 유한하지만 회사 동료는 무한할 수 있다. 예전에 존경하는 회사 선배가 말해주길 회사에서 세명만 챙기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회사를 떠나서도 나와 진심으로 만날 수 있는 한 명의 선배, 한 명의 후배, 한 명의 동기를 만들라고 당부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나는 3명의 동기와 30년 넘게 만나면서 집에다간 동기 모임이라고 하고 우리끼리는 '블루' 모임이라 말한다. 현재 블루는 3년 후 해외여행을 같이 가기 위해서 매달 회비를 모으고 매달 모이고 있다. 성공한 인생!!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또 다른 30년을 함께할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블루 이름은, 파란피를 연상하는 것 같지만, 절대 아니다. 그날 조니 워커 블루를 마시다가 이름을 블루로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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