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랑이 내게 있었다

by 하람

“오늘은 일찍 가야 해.”

내가 있는 침대로 들어오기 위해 검은색 양복 자켓을 벗으며 그는 내게 통보하듯 말했다. 침대 옆 탁상 위에 잠시 올려놓은 핸드폰의 액정을 스치듯 몰래 터치함으로써 시간을 확인하는 그의 모습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나는 늘 후순위 여자라는 사실이 서늘하게 칼처럼 날아와 내 가슴팍을 쑤셔놓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에 만족했고, 그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자 상기했다.


“나를 남자답게 만드는 건 너뿐이야.”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그럼 그 여자는 널 남자답게 만들지 않아? 그런데도 그 관계를 대체 왜 그만두지 않는거지?’

묻고싶었지만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그럼, 그와 나의 관계가 끝장날 수도 있을테니까. 대신 말없이 그를 안았고 그의 향기로 내 폐를 가득 채우겠다는 양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이 집이 내게는 가장 평안하고 안전한 장소였다. 15평 남짓한 내 자취방은 2명이서 생활하기에 좁은 감이 있었지만 어느 가난한 젊은 부부가 살림을 시작하다면 오히려 소박하고 정다운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퇴근한 부부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다정하게 손을 잡으며 하루 마무리를 하는 것. 지금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와 나는 직장 동료 선후배 사이었기에 바깥에 외출한 우리의 모습을 회사 사람 누군가가 본다면 상상하기 싫은 끔찍한 일들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뒷얘기들, 의심스럽게 우리의 표정과 행동거지를 뜯어 볼 눈초리와 혐오스러운 눈빛. 우리 스스로 이 관계를 부끄럽게 여기는 만큼 이 곳은 우리의 도피처이자 동시에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나 갈게. 푹 자.“

도어락 잠긴는 소리가 들리고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차분하고 여유있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는 그가 있어야할 곳으로 서둘러 달려가고 있었다.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가 없는 집에서 생활할 때는 조명을 모두 꺼둔다. 불을 키면 그의 미소와 행동이 생각나고, 그를 떠올리며 스스로 공허와 허무에 내던지는 나를 지켜보기 두렵기 때문이다. 현실로 돌아올 시간. 현실이란 곳은 깜깜하고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내가 내편이 되어줄 수 없는 공간. 아프고 혼란스러운 공간.


이런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도피라고는 잠뿐이다. 졸립지 않지마 침대에 누워 눈을 꼭 감고 그와 함께 이 집에서 보낸 장면들, 순간들을 쪼개어 복기한다. ‘그와 결혼하게 된다면 이런 결혼 생활을 하게 되겠지.’ 퍽 그럴싸한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며 억지로 잠을 청한다. 오늘도 그의 꿈을 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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